딸기네 책방

도대체 극단주의가 뭐야?

딸기21 2020. 6. 16. 16:01


도대체 극단주의가 뭐야? Extremismus 
안야 러임쉬셀, 김완균 옮김. 비룡소

‘난 OO 민족은 싫어’ 
‘OO 출신에게 우리와 똑같은 혜택을 주는 정책에 반대한다’
‘OO들에게는 임금 기준을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

저자가 이야기했던 극단주의자들의 말들입니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이야기이지 않나요?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을 공격하자, 아라비아반도 남쪽 끝에 있는 예멘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이 나라 저 나라로 탈출을 했습니다. 그 전에 유럽에서는 내전에 시달리던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온 난민들이 대거 피신해가면서 ‘난민 소동’이 벌어졌지요. 


신문이나 방송 국제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사건이 한국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예멘 난민 500여명이 말레이시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온 겁니다. 말레이시아와 ‘무비자 입국’ 협약을 맺고 있기 때문에 마침 직항편이 있었고, 한국에 대해 잘 모른 채로 피난처를 찾던 예멘 사람들이 제주도에 오게 된 거였습니다. 이 과정에 어떤 ‘음모’나 누군가의 나쁜 의도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말 그대로 대소동이 벌어졌지요. 소셜미디어와 뉴스 댓글들에는 ‘저들은 이슬람 테러집단’이다, 아랍계 남성들이 들어와서 한국 여성들을 성폭행할 것이다, 우리 세금을 저들에게 쓸 수는 없다는 비난이 들끓었습니다. 그 중에는 이해할만한 우려도 있었지만 인종차별적이거나 특정 종교를 혐오하는 발언들도 적지 않았지요.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자기 직장을 마음대로 선택할 권리가 없습니다. 일터를 옮기고 싶으면 고용주, ‘사장님’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국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권리 중에 외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보장되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대체로 임금이 낮고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곳에서 많이 일합니다. 그런데 2019년 6월 한국의 주요 정당 대표는 “외국인들에게도 같은 임금을 적용하는 건 불공평하다”고 했습니다. 최저임금은 국적과 상관없이 현재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최소한도로 인간적인’ 생활을 하는 데에 필요한 임금을 정해놓은 것인데, 외국인들에게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자고 한 겁니다. 그런데 한국인들 중에는 이런 주장에 찬성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일베’라는 사이트에는 과거 정권이 저지른 범죄를 옹호하고 민주화 투쟁은 깎아내리는 글이나 여성과 소수자들을 향한 폭력을 부추기는 글들이 적잖게 올라옵니다. 그런가 하면 특정 지역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OOO를 처단하라” “베어버리자”며 서울 광화문 복판에서 시위를 벌이는 ‘어버이연합’ 같은 단체들도 있고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마땅히 보장해야 할 ‘표현의 자유’라고 볼 수 있지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 꺼림칙한 기분이 남습니다. 이렇게 막말을 해도 괜찮은 것일까. 누군가를 몰아내고 차별을 하는 게 과연 우리 사회를 안전하고 살기 좋게 만드는 길일까. 혹시나 누군가 비뚤어진 생각을 가진 사람이 거리로 나와 나를 공격하면 어쩌지. 저런 댓글들이 사람들 사이에 증오를 너무 부추기는 건 아닐까.

사실 우리에게는 낯선 극단주의

 

이 책에서 저자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를 바라면서’ ‘민주 법치국가를 무너뜨리려’ 하는 것을 극단주의로 표현합니다. 다르게는 ‘독재 정치를 열망하는 태도’를 극단주의라고 했지요. 


하지만 극단주의자들 중에 스스로 ‘독재자를 원한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난민들을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도 그것이 ‘우리의 민주주의’에 맞는다고 주장합니다. 여성들을 억압하는 이슬람법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이것이 진짜 무슬림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낙태와 동성애에 극렬 반대하는 이들이 ‘우리는 생명과 윤리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독재 정치나 독재자를 지지하는 열망이 민주주의에 대한 말들과 섞여 있기 때문에 시민들의 공부와 고민이 그만큼 더 필요합니다.

극단주의는 겉으로 드러난 주장이 어떤 것이 됐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견해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일 수도 있고, 피부색이나 민족·종교·성적 지향·언어 등등의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몹시 급진적인 변화를 원하면서 주류의 정치적·종교적·사회적 견해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 해도,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며 공존을 인정한다면 극단주의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타인의 생각을 강제로라도 바꿔야 한다고, 혹은 그 사회에서 그들을 없애야 한다고 우긴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생각이나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존재를 거부하게 됩니다. 엄연히 법과 제도가 있는데 나와 다른 이들을 몰아내려면 현행법을 어기고 폭력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만 공격을 한다면 증오·혐오발언이지만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 행동에 나서면 테러 혹은 극단주의자의 증오범죄가 됩니다.


이런 ‘극단주의’는 한국에서는 낯선 현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앞에서 얘기했듯 난민이나 이주자, 특정 종교나 소수집단을 비판하는 것을 곧바로 극단주의라 부를 수는 없지만 그것이 끔찍한 비극과 사회 전체를 옥죄는 공포로 다가올 수도 있으니까요. 미국에서 ‘히스패닉’ 이주자를 혐오하는 사람이 2019년 10월 텍사스주에서 총기난사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말이죠. 노르웨이, 호주, 독일을 비롯해 곳곳에서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국가 대항전 축구경기를 볼 때나 올림픽에 ‘단일팀’으로 출전한 남북한 팀을 응원할 때에 우리는 ‘민족’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실체가 우리 안에 있음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민족은 때론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단어일 수 있지만, ‘민족’의 이름을 내거는 것이 사실은 극단주의로 가는 징검다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생각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모든 사회적인 이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혐 발언이나 젠더·세대 갈등을 부추기는 발언을 하고 혐오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그 자체로 제각각의 사회적 이슈입니다. 댓글을 달고 친구들끼리 단톡방에 글을 올리는 것만으로 ‘극단주의’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이 키보드 배틀에 그치지 않고 무기를 들고 누군가를 공격한다면 그 때에는 극단주의라 봐야겠지요. 그것이 폭력까지 쓰게 만드는 ‘이즘(주의·주장)’이 되면 극단주의의 위협이 한국에서도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댓글로 난민들의 출신 국가나 종교를 공격하고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것을 극단주의라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걱정스러운 현상인 것은 분명합니다. 

극단주의가 탄생한 정치 경제적 배경 

이 책은 극단주의의 여러 형태들을 다루면서 개개인이 어떤 상황일 때 극단주의에 빠져들게 되는지 설명합니다. 개인이 극단적인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빠져드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렇게 빠져드는 개인의 숫자가 꽤 많다면 그것은 그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절망감을 느끼거나 비슷한 위기에 빠진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른다는 얘기가 되니까요. 책에서는 개인의 선택 측면을 주로 설명하고 있으나 극단주의를 이해하려면 그런 이들이 적잖이 생겨나게 만드는 정치적·경제적인 바탕도 들여다봐야 합니다. 

21세기에 극단주의가 고개를 치켜들게 만든 구조적인 요인으로는 냉전의 붕괴와 저성장이라는 정치·경제의 두드러진 두 양상을 짚을 수 있습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이 끝나고 20세기 후반부의 세계는 역설적이지만 안정돼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나라들이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권위주의형 정치체제냐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냐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처럼 자유민주주의 속에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택한 나라들도 있었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중남미의 여러 나라들처럼 권위주의적인 지도자가 집권해 자본주의형 발전을 택한 나라들도 있었습니다. 중동 국가들은 군부 독재정권이나 권위주의적인 정권이 들어선 가운데, 공산주의는 아니어도 국가가 주도하고 공공부문이 경제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경제시스템을 갖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민주주의와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냉전은 끝났습니다. 억지로라도 국가나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던 이데올로기는 사라졌습니다. 동시에 20세기 후반부 50년 동안 고속성장을 하던 세계 경제도 정체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학교를 나오면 취직을 하고, 회사에서 일하면 월급이 오를 것이라 믿어왔는데 그 믿음이 깨진 겁니다. 경제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고 일자리는 줄어듭니다. 처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못 사는 자식 세대가 나오는 것이 지금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공통되게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과 가진 것을 잃게 된 ‘베이비부머’ 세대가 극단주의에 빠져드는 것은 이런 맥락 속에서 봐야 합니다. 존재 가치와 생존 수단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나와 다른 사람들’ 혹은 기성 제도를 적으로 돌리고 폭력적·선동적인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는 거니까요. 게다가 이미 세계는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세계화와 통신·미디어의 발달은 극단주의가 퍼지는 배경이자 도구입니다. 이주민이 밀려온다, 중국 공장들 때문에 내 일자리가 사라진다, 노인들이 세금을 다 갉아먹는다, 저들의 종교가 우리를 위협한다는 생각들이 순식간에 수백만 명에게 퍼질 수 있는 시대가 된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일부러 선동을 합니다. 당장 폭력이 난무하지는 않더라도 몹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책에는 청소년들을 상대로 문화활동을 하거나 사회단체를 이용해 극단주의적인 생각을 전파하는 양상이 소개돼 있습니다. 총을 들고 뛰쳐나가는 극단주의자는 말 그대로 극소수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라든가 유럽의 극우파들, 한국의 일부 정당들처럼 정치적·종교적 극단주의의 경계선에 있는 정치세력들이 적지 않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 외국인을 몰아내자고 선동하거나 공공연히 차별을 정책으로 내거는 일 같은 것도 극단주의의 징후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문제, 극단주의
 
극단주의냐 아니냐를 딱 잘라 구분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극단주의의 위협은 바로 그 모호함을 뚫고 사회를 더 위험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미묘한 경계선 위에서 극단주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유럽에는 혐오발언이나 선동을 법으로 금지한 나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극단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우리에게 생소한 견해에 쉽게 극단주의의 딱지를 붙이는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무슨무슨 ‘주의자’라고 규정하는 것에는 늘 함정이 있기 마련이고,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늘 따라다닙니다. 미국 정보기관이 극단주의 테러를 막겠다며 세계 수억 명을 불법으로 도·감청했다가 2016년 폭로된 적도 있고요. 어디까지 포용하고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인 것이고, 그것이 한 사회의 포용력과 자정 능력을 보여주는 잣대가 되겠지요. 


2011년 노르웨이에서 브레이비크가 극우 테러를 일으켰을 때 옌스 스톨텐베르크 당시 노르웨이 총리는 희생자들을 기리며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개방성, 인간애”라고 했습니다. 이 책은 아직은 멀게 느껴지는 극단주의 현상을 청소년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문제’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국가나 정보기관이 할 일이 많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극단주의를 용납하지 않고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존중하려는 시민들의 태도입니다. 언론의 보도나 소셜미디어의 댓글 하나를 보면서도 혹시나 이것이 누군가를 공격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게 아닌지, 혹은 의도치 않게 그런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지 생각해보는 것이 시민 한 명 한 명이 극단주의에 맞서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더 깊고 더 넓고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