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의회가 ‘러시아의 야만적인 파괴로부터 크림반도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지난 22일(현지시간)의 일이다. 우크라이나가 특히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크림반도 바흐치사라이에 있는 ‘칸의 궁전’으로, 현지에서는 ‘한사라이(Hansaray)’라고 불린다. 궁전을 가리키는 ‘사라이’라는 터키어 단어에 이 일대를 몇 백 년 동안 지배했던 오스만투르크의 흔적이 남아 있다.
16세기에 세워진 한사라이는 오스만제국 시절 크림반도를 지배한 지라이칸 왕실의 궁전이다. 성 안에는 칸(군주)의 후궁들이 살았던 하렘을 비롯한 주거구역과 정원, 관리들의 공간이던 디반카나와 모스크가 있다. 오스만과 이란과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설계했다. 건축양식과 실내 장식은 ‘크림 타타르 스타일’로 불리는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톱카프사라이와 돌마바흐체 궁전,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과 함께 유럽에 위치한 이슬람 건축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힌다. 1820년대에 이곳을 방문한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푸슈킨은 정원의 인공 샘에서 영감을 얻어 ‘바흐치사라이의 샘’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에서 2013년 말부터 시작된 격렬한 반정부 시위로 친러시아 대통령이 축출되고 정정이 불안해지자, 러시아는 그 틈을 타 2014년 3월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우크라이나 의회에서 통과된 것은 1954년 제정된 유엔 헤이그 협약의 부속조치로 만들어진 1999년의 ‘분쟁지역 문화유산 보호조약’을 비준하고 한사라이의 ‘보호를 강화하는’ 법안이다. 러시아 문화부는 2016년 한사라이의 몇몇 구조물들을 수리한다고 발표했다. 그 후 러시아의 민간단체 등을 통해 공개된 사진을 보면 수리 과정에서 한사라이의 몇몇 벽면 타일들이 스페인산 타일들로 바뀌었고 지붕도 일부 교체됐다.
2018년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한 회사가 한사라이 복원 작업을 수주했는데, 전문성이 의심스럽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회사라는 지적이 나왔다. 러시아 시민운동가들은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러시아 문화부장관이 사실상 소유주인 위장회사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지난해 3월에는 크림반도 소수민족 운동가 에뎀 두다코프가 한사라이 수리작업을 찍은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마구잡이 공사를 비판했다. 그는 “러시아는 문화재 복원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경험도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을 투입해 유산을 망치고 있다”며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든 한사라이 바닥을 삽으로 파헤치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가 한사라이 공사를 막을 방법은 딱히 없다. 기댈 곳이 있다면 유네스코 정도다. 2016년 국제형사재판소(ICC)는 러시아가 점령한 크림반도를 ‘국가 간 무력분쟁 지역’으로 규정했다. 우크라이나위클리는 이번 법안에 기대어 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네스코에 한사라이를 보호하기 위한 ‘기술적인 지원’을 요청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유네스코가 나선다 해도 러시아의 공사를 막을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수백년 역사의 유적이 이렇게 또 위기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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