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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깊이보기]“WHO에 돈 안 내” 트럼프 또 '중국 탓'

딸기21 2020. 4. 8. 16:32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일(현지시간)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코로나19 대응을 설명하고 있다.  워싱턴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보건기구(WHO)에 돈을 내는 것을 보류할까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코로나19 감염자가 40만명에 이르고 사망자 수도 치솟는 상황에서도 백악관 브리핑은 연일 자화자찬 일색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나는 칭찬받아야 한다”는 발언 등이 빈축을 사자 늘 그렇듯 이번에도 ‘외부의 적’을 찾아나선 것이다.

 

이번에 찾아낸 ‘화살돌리기’의 대상은 중국과 WHO다. 문제는 트럼프 정부가 정치적 목적에서 WHO 기여금 납부를 진짜로 보류하기라도 할 경우, WHO의 주요 기여국들이 모두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보건역량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현지시간) 백악관 코로나19 태스크포스(TF) 브리핑에서 “WHO는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는다. 우리가 내는 돈이 가장 비중이 크다”며 말을 꺼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WHO는 (중국) 여행을 금지한 내 조치를 비판했다. 그들은 틀렸다. 많은 것에서 틀렸다”고 했다. “WHO는 시기를 놓쳤다” “그들은 너무 중국 위주”라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뭘 위해 돈을 내는 건지 들여다볼 것”이라며 기여금 납부를 “보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도 WHO가 중국 중심적이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CNN 등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방역 실패 책임을 회피하고 국민들의 비판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WHO와 중국을 거론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위티어의 슈퍼마켓 앞에 7일(현지시간) 생필품을 사려는 주민들이 줄을 서 있다. 위티어 AP연합뉴스

 

트럼프 정부가 이런 인식을 보여준 것은 처음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줄곧 이 감염증을 ‘중국 바이러스’ ‘중국 폐렴’이라고 부르다가, 지난달 24일에야 표현을 바꿨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이 감염증을 ‘우한 바이러스’ 등으로 불렀고, 트럼프의 경제정책 브레인으로 알려진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은 “중국이 마스크를 만드는 미국 회사 공장을 국유화했다” “중국이 WHO를 망쳤다”고 발언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대응에 공조해야 할 판에, 팬데믹 상황에서 유엔 보건기구의 돈줄을 끊겠다는 발언은 비판을 부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기자들의 질의가 줄을 잇자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겠다는 게 아니라,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백악관이 유엔의 역할과 미국의 국제적 책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재확인시켜준 것이었다.

 

WHO는 이 발언에 대해 입장을 내놓지 않았지만 안팎의 우려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WHO에는 196개 국가·영토가 가입돼 있다. 유엔 회원국 중에는 유럽의 소국 리히텐슈타인 정도만 빼놓고 모두 들어가 있다. 팔레스타인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반대 때문에 ‘옵서버’로 가입했으며 바티칸도 옵서버다. 재정은 회원국 기여금과 유엔을 비롯한 다른 기구들의 지원금으로 충당한다. WHO 보고서에 따르면 2020~2021년 예산은 약 48억달러다.

 

 

회원국 기여금은 강제 할당금과 자발적 기여금으로 나뉜다. 올해와 내년의 회원국 할당금 총액은 약 10억달러인데 미국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전체 할당금액의 22%를 미국이 부담한다. 이어 중국 12%, 일본 8.6% 순이다. 그 외에 돈을 많이 내는 나라는 코로나19로 엄청난 타격을 입고 있는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국들이다. 한국의 할당금 비중은 2.3%로 11번째다.

 

이런 팬데믹이 퍼졌을 때 각국의 대응을 조율하고 연구를 지원하는 일도 하지만, 평시에도 WHO는 폴리오(소아마비) 백신 접종을 비롯해 빈국들의 열악한 보건인프라를 메워주는 일들을 한다. 기여금이 줄면 이런 역량이 줄어든다. 저개발국의 가난한 이들은 생명을 위협받는 것이다. 미국이 지갑을 닫으면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와는 반대로 WHO에서 중국의 입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7일(현지시간) 가톨릭 신부가 자동차에 탄 승객들에게 ‘드라이브 스루 축복’을 해주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기여금을 가지고 유엔을 위협해왔다. 미국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며 유엔 재정분담금 납부를 미루자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해 “직원 월급도 못 준다”고 호소했을 정도였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17년 미국은 유엔인구기금(UNFPA) 기여금 6900만달러를 전액 삭감했으며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사업기구(UNRWA) 예산도 3억달러 줄여버렸다. 이스라엘 미국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에 국제사회가 반대하자 지난해 다시 돈줄을 끊겠다고 협박했다.

 

미국이 “기여금을 내지 않겠다”면서 유엔과 국제사회를 을러댄 것도 트럼프 정부가 처음은 아니다. 미국은 냉전 말기인 1985년 유네스코를 탈퇴했다. 사무국이 방만하게 운영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1국 1표’ 원칙 때문에 소련과 가까운 회원국들 의견이 많이 받아들여지는 것에 반발한 것이었다. 한때 예산 절반을 책임졌던 미국이 나간 뒤 유네스코 재정은 크게 흔들렸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때인 2003년에 이라크 침공으로 미국의 위상이 추락하자 국제여론을 돌리기 위해 재가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