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마스크에는 국경이 있다? EU '코로나 시험대'

딸기21 2020. 3. 9. 22:09

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토리노의 알리안츠경기장에서 프로축구 세리에A 유벤투스와 인테르밀란의 경기가 코로나19 때문에 관중 없이 치러지고 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텅빈 관중석을 배경으로 점프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토리노 EPA연합뉴스

 

이탈리아 코로나19 누적 확진자가 8일(현지시간) 중국 다음으로 많은 7300여명이 됐다. 전날보다 1500명 가까이 급증했고 하루새 130여명이 숨졌다. 이탈리아를 기점으로 유럽 전역에 퍼지고 있는 감염증은 2015년 난민 유입사태와 이듬해 브렉시트에 이어 다시 유럽을 시험대에 올리고 있다.

 

이탈리아 보건당국은 이날 오후 전국의 누적 확진자를 7375명으로 집계했다. 누적 사망자는 366명에 이르렀다. 주세페 콘테 총리는 감염증이 퍼진 북부 롬바르디아주 등 14개 지역을 봉쇄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총리실 웹사이트 공지문에 따르면 대중이 모이는 행사는 금지되고 초·중등학교와 대학들은 휴업을 한다. 극장과 박물관을 비롯한 문화시설들은 문을 닫고, 문화·종교행사와 축제들은 미뤄진다. 술집과 카지노도 폐쇄된다.

 

스포츠행사와 경기는 중단된다. 수영장, 스포츠센터, 온천, 문화센터 등도 영업을 중단한다. 현지 언론들 표현을 빌면 “4월 3일까지는 빙고 게임도 못 하고” “인구 4분의 1의 생활이 마비되는” 것이다. 이날 모데나 교도소에서는 제소자들이 가족 면회를 금지한 것에 반발해 폭동을 일으켜 최소 3명의 수감자가 사망했다. 다른 교도소들에서도 줄줄이 소요가 일어났다.

 

마스크와 약품, ‘의료의 국경’

 

프랑스와 독일은 8일, 스페인은 9일 확진자가 1000명을 넘어섰다. 스페인은 하루 새 360여명이 늘었다. 스위스,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 등이 줄줄이 감염자 200명을 넘겼다. 유럽연합(EU) 보건장관들이 앞서 6일 브뤼셀에서 머리를 맞댔지만 대응은 지지부진하다. 아담 보이테흐 체코 보건장관은 회의에서 “마스크를 비롯한 방역장비가 모자란다”고 EU 집행위에 호소했다. 집행위의 답변은 “감염병 대응절차를 진행하는 데에 2주는 걸린다”는 것이었다. 이날 브뤼셀에서는 EU주재 회원국 대사들도 모일 예정이었으나 취소됐다. EU 본부 직원이 확진을 받았고, 이 직원을 만난 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벨기에도 확진자가 200명이 넘는 상태다.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앞에 8일 일회용 마스크가 떨어져 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날 북부 롬바르디아주를 비롯한 14개 지역으로 ‘코로나19 봉쇄’를 확대했다.  로마 AP연합뉴스

 

유럽 전역에서 마스크 대란 조짐이 일고 있고, 당장 방역 물품과 의약품 수급부터 해결해야 한다. 존 라이언 EU 보건담당 고위대표는 “중국 상황과 인도의 결정 때문에 의약품과 원재료 공급이 문제”라고 인정했다. 중국산 약품 수입이 줄어든데다 인도가 4일 의약품과 원재료 수출 제한에 들어갔다. 유럽연합의약품그룹(PGEU)에 따르면 이미 약품, 특히 호흡기질환 치료제가 모자라기 시작했다. 아직 감염 확산 초기단계인데 앞으론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방역물품·의약품 ‘수출제한’이라는 민감한 이슈는 EU를 고민스럽게 만들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집행위에 “회원국들이 마스크와 의약품을 EU 바깥으로 수출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뿐 아니라 프랑스는 손소독제와 마스크 등의 국외 반출도 금지했다. 올리비에 베랑 프랑스 보건·사회연대부 장관은 공영라디오 등에 “우리가 보호주의자는 아니지만 재고가 떨어지게 해선 안 된다”고 했다. EU는 프랑스의 조치에 곤혹스런 처지가 됐다. 회원국들이 역내 물품이동도 막으면서 ‘의료 국경’을 세우면 공동 대응은 멀어진다.

 

봉쇄된 밀라노, 북페어 여는 브뤼셀

 

혼란이 벌어진 이면에는 ‘국경은 합쳤는데 보건은 나뉘어진’ EU의 현실이 있다. 북부 감염이 시작된 뒤 검사를 늘리고 강력한 조치를 취한 이탈리아의 대응은 역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고 세계보건기구(WHO)도 칭찬했다. 이탈리아와 닿아 있고 감염자가 100명이 넘은 오스트리아는 위기의식이 크다. 제바스티안 쿠르츠 총리는 8일 “이탈리아처럼 전격적인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며 EU 전체가 긴밀히 협력해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프랑스 남부 니스의 국제공항에 9일(현지시간) 코로나19 방역 안내문이 붙어 있다.  니스 로이터연합뉴스

 

그러나 유럽에서 이탈리아 다음으로 확진자가 많은 프랑스에선 ‘5000명 이상 모이는 실내행사 금지’ 외에 이동 통제는 없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여러 차례 “유행병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올리비에르 베랑 보건장관은 리베라시옹 인터뷰에서 “정부 서비스를 지속하는 게 중요하다”며 “국가의 경제·사회 생활을 마비시켜선 안 된다”고 했다. 일단 프랑스 당국은 감염자나 의심환자들이 ‘스스로 격리’하게 하고 있다. 병원보다 집에 머물도록 권하기 때문에 확진받지 않은 환자들이 더 많을 수 있다. 이웃한 벨기에도 느슨한 편이다. 파리 북페어는 취소됐지만 브뤼셀은 10~12일 북페어를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했다.

 

독일은 7일 대규모 행사는 취소하거나 철회할 것을 권고했으나 별다른 통제조치는 없다. 옌스 슈판 보건장관은 dpa통신에 “며칠 새 급변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며 더 적극적인 대응을 시사했다” 독일과 산업계가 걱정하는 것은 중국에 이어 자동차 부품공장 등 산업시설이 많은 이탈리아마저 생산라인이 멈추는 것이다.

 

항공교통 통제를 비롯해, 다른 회원국들의 조치도 제각각이다. 크로아티아, 헝가리, 아일랜드는 자국민들에게 이탈리아 여행 자제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를 오가는 철도노선을 중단시켰다. 프랑스에서는 밀라노에서 온 버스도 멈춰세우고 승객들을 검역했다. 나라마다 위기의 체감도가 다른 것도 있지만 회원국들의 보건의료 관리체제가 저마다 다르고 통합돼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스를 겪고 나서 2005년 스웨덴 스톡홀름에 유럽질병통제센터(ECDC)를 만들었으나 직원 300명에 연간 예산은 500만유로(약 65억원)에 불과하다. 감염증이 퍼지면 통계를 모으고 예방 정보를 공유하는 수준이다.

 

스텔라 키리아키데스 유럽연합(EU) 보건담당 고위대표(가운데)와 야네스 레나르치치 위기관리담당 고위대표(왼쪽) 등이 지난 6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EU 본부에서 보건장관 회의를 하기 앞서 연설을 하고 있다.  브뤼셀 AFP연합뉴스

 

이민자 핑계…공격 기회 잡는 우파들

 

극우 정치세력은 이 참에 역내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 솅겐조약을 무력화하려는 선동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 극우 정치인 마테오 살비니는 “연합(유니온)이라더니 우리가 필요로 할 때는 지갑을 닫고 문을 잠근다”며 “비상사태만 끝나면 브뤼셀과의 관계를 비롯해 모든 걸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극우파 마린 르펜은 이탈리아 쪽 국경을 아예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난민들을 막고 EU의 인권정책에 번번이 반대해온 헝가리의 우파 오르반 빅토르 정부는 코로나19 사태를 이민 통제 기회로 삼으려 한다. 오르반 총리의 보좌관은 아무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불법 이주자들이 코로나바이러스의 연결고리들”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미국 뉴욕타임스는 “글로벌 전염병이 글로벌화에 대한 백래시(역습)에 기름을 붓고 있다”고 썼다. 역병을 핑계로 연대와 통합을 내던지고 민족주의와 국경을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은 유럽의 미래에 전염병보다 훨씬 더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브렉시트 이후 자력갱생을 해야 하는 영국은 초반부터 감염자 검사 규모를 늘리며 높은 경계감을 보이고 있다. 정부 보건책임자 크리스 위티는 지난 5일 의회에 나와 “인구의 80%가 감염되고 15~20%는 병원치료를 받아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거론하며 대비를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