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02년부터 5년 동안 저장성 공산당 서기를 맡았을 때 현지 신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썼고, 이를 묶어서 ‘즈장신위(之江新語)’라는 책을 썼다. 즈장은 저장성을 흐르는 첸탕장(錢塘江)의 별칭이다.
‘즈장신위’는 남부 경제중심지 중 하나인 저장성을 맡은 시진핑의 철학과 사상을 담은 책으로 꼽혔고, 거기 동의하며 시진핑에게 충성하는 일군의 당 관료들이 생겨났다. 홍콩 언론인 마하오량(馬浩亮)이 이 그룹에 시진핑 저서를 따서 ‘즈장신쥔(之江新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 시 주석의 상하이·칭화대 인맥을 합친 것이 시자쥔(習家軍)이라 불리는 측근 그룹이다.
시진핑 키즈, ‘즈장신쥔’
장쩌민 전 국가주석 계열의 상하이방이나 당 고위간부 2세들인 ‘태자당’ 같은 세력과 달리, 즈장신쥔은 중앙정계로 대거 진출하지는 않았다. 시 주석 집권 뒤 ‘중앙’으로 올라온 이들도 있기는 했지만, 즈장신쥔의 주요 멤버들은 지방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각지에서 당과 정부의 요직을 맡으며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시 주석의 이념과 정책을 퍼뜨리고 실행하는 동맥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미국의 중국학자 궈쉬에쯔가 지난해 쓴 <중국 핵심 지도부의 정치학>에 따르면 2017년 시 주석 집권 2기의 출범을 전후해 즈장신쥔은 명실상부 중국 주요 도시와 성들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시 주석이 저장성에 있을 때 취저우·타이저우 시 당서기를 지낸 차이치(蔡奇)는 베이징 당서기가 됐고, 리슈이 당서기 로우양셩(樓陽生)은 샨시성장으로 갔다. 닝보 당서기였던 네이멍구 출신의 바인차오루(巴音朝魯)는 이미 2014년 지린성 당서기가 됐다. 저장성에서 시 주석 비서를 했던 리창(李强)은 상하이, 저장성 당 선전부에서 일한 천민얼은 충칭 당서기가 됐다.
시 주석 밑에서 저장성 부당서기를 했던 샤바오룽(夏寶龍)은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부주석으로 승진했다. 저장성 법원과 당 기율검사위원회를 이끌던 잉융(應勇)은 상하이 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쿤밍(黃坤明) 중앙선전부 부장, 중샤오쥔(鍾紹軍)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실 부주임, 천더룽(陳德榮) 바오우철강회사 사장 등도 이 그룹의 일원들이다.
시 주석이 즈장신쥔에서 최근 두 사람을 다시 발탁했다. 세계의 시선이 쏠린 후베이성 당서기로 13일 임명된 잉융이 그 중 한 명이다. 코로나19에 부실 대응한 장차오량(蔣超良)이 물러나고 그 뒤를 잉 신임 서기가 맡았다.
‘후베이 소방수’ 잉융
올해 62세인 잉 서기는 저장성이 고향이고, 항저우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1979년 당에 들어갔다. 저장성의 소도시 시장과 성 경찰 간부, 법원장 등을 거쳤으며 상하이 법원장과 당 부서기, 부시장을 역임했다. 2017년 상하이 출신이 아님에도 이례적으로 상하이 시장에 임명됐다. 시 주석의 신임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잉 서기가 후베이 코로나19 사태의 소방수로 나서게 된 배경에 대해 환구시보는 “치안유지와 법무 경험이 많고, 정확한 결정들을 내릴 수 있는 해결사”라고 설명했다. 신문에 따르면 잉 서기는 후베이로 옮겨오기 전 상하이에서 코로나19 발생을 보고 일찍부터 바이러스 통제에 나섰으며, 특히 상하이에서 일하는 수백만 이주노동자들에게 감염증이 퍼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주력했다. 지방정부의 대응과 ‘과학적 접근’을 강조해왔고, 이달 초에는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때의 경험에서 배우기 위한 심포지움을 열었다고 전했다.
상하이의 코로나19 확진자는 17일까지 150여명으로, 중국 내 확산세를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적다. 미국 포브스가 “상하이의 적은 감염률이 진짜인지” 의문을 제기할 정도다. 잉 서기의 시장 시절 대응이 상하이에서 효과를 거둔 것이라면 대단한 실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잉 서기가 임명되던 날, 후베이성은 ‘임상진단’으로 확인된 환자들도 코로나19 감염자에 포함시켰다. 그후 이삼일 동안 사망자 수백명, 확진자 2만여명이 추가되면서 감염 통계가 껑충 뛰어올랐다. 중국 정부가 그동안 환자 수를 줄여왔다가 비판이 일자 진단 기준을 바꾸는 방식으로 숫자를 늘린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있다. 후베이성 측이 중앙 정부에 보고하면서 전염 규모를 은폐했고, 이 때문에 임상진단에서 감염 증상을 보인 환자들이 방치되는 사태가 벌어져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것이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다급해진 베이징 중앙정부가 후베이성 지도부를 교체하면서 잉 서기를 불러냈고, 누락된 환자들을 추가하다보니 숫자가 치솟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환구시보는 전염병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상하이의 경우 잉 서기 주도 하에 시 관료들이 “전염병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데이터에 기반해 신속히 과학적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며 후베이성의 부실 대응과 대비시켰다.
앞서 중국 정부는 반정부 여론을 통제하기 위해 중앙정법위원회 비서장인 천이신(陳一新)을 우한에 보냈다. 천 비서장 역시 즈장신쥔 그룹에 속한 인물이다.
홍콩 떠맡은 샤바오룽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잉 서기 임명에 관심이 많이 쏠렸지만, 같은 날 임명된 또 다른 즈장신쥔 멤버가 있었다. 국무원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 주임을 겸하게 된 샤바오룽 정협 부주석이다. 68세의 샤 부주석은 톈진 출신인데 2003년 저장성 당 부서기가 돼 시 주석과 호흡을 맞췄다. 저장성장을 거쳐 성 당서기가 됐고, 2017년 베이징 중앙 무대로 이동했다. 시 주석의 측근일 뿐 아니라, 스타일도 비슷해 ‘시진핑 판박이’라 불린다.
그에게 홍콩을 관할하는 임무를 맡긴 이유는 분명하다. 지난해 홍콩 시위가 불거졌을 때 홍콩·마카오 판공실이 사태를 안일하게 평가해 중앙정부의 판단을 그르쳤고, 결국 대혼란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시 주석이 그 책임을 물어 판공실 책임자를 교체하면서, 자신이 믿을만한 인물인 샤 부주석을 앉혔다고 AFP 등은 분석했다.
샤 부주석은 저장성 시절 기독교 교회들을 강도 높게 탄압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 주석의 핵심 측근이자 강경파인 그를 임명함으로써 홍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것임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샤 부주석 임명을 환영하면서 “중앙정부가 홍콩을 중시한다는 걸 보여준다”고 했다.
우한의 감염증과 홍콩의 시위는 시 주석 체제를 흔드는 양대 이슈다. 홍콩 시위는 본토 주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세계에서 중국에 대한 비판과 반발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알렸다가 당국의 탄압을 받고 끝내 병사한 의사 리원량의 죽음은 ‘본토’에서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요구에 불을 붙였다.
시 주석 체제를 비판한 칭화대 교수 쉬장룬(許章潤)과 ‘시민기자’ 천추스(陳秋實)는 연락두절 상태이고, 인권운동가 쉬즈융(許志永)은 체포됐다. 시 주석은 우한과 홍콩 문제에 즈장신쥔을 내세움으로써 흔들리는 지도력을 다시 다지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측근을 내세우고 사람들 입을 막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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