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이라크에서 이란의 유력 군 장성 가셈 솔레이마니를 드론으로 공습해 표적살해한 뒤 중동 분위기가 심상찮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4일(현지시간) 열린 솔레이마니의 장례식에는 수만 명이 운집했고, 테헤란의 입김에 반발해온 이라크의 ‘반이란 감정’은 솔레이마니 살해 이후 ‘반미 정서’에 자리를 내줬다. 레바논 베이루트에도 솔레이마니의 대형 사진들이 걸렸고, 이라크·레바논·팔레스타인의 무장조직들은 일제히 미국 규탄에 나섰다. 이란은 보복을 다짐했다.
최대 관심사는 중동의 전운이 실제 포연으로 이어질 것인지다. 현재로 봐서 중동이 이라크전과 시리아 내전에 이은 ‘세 번째 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낮다. 미국도, 이란도 그렇게까지 몰고 갈 의지와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솔레이마니는 이란 혁명수비대 안에서 대외작전을 담당하는 고드스의 사령관으로서 이라크와 시리아·레바논 등지의 친이란 무장세력들을 지원해왔다. 러시아를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게 만든 다리 역할을 했고, 이슬람국가(IS)와 싸우는 시리아 정부군과 각 지역 민병대들의 전투를 도왔다. 이란의 대외 팽창정책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미국 입장에선 역내 패권을 흔드는 현실적인 위협이기도 했다. 이란의 ‘선을 넘은’ 세력 확대에 제동을 걸기 위해 사령관 살해라는 초강수를 뒀지만, 백악관과 미 국방부는 미국 시설들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자위권을 행사한 것일 뿐이라고 계속 강조하고 있다.
중동 미군 증파는 이미 예고됐던 것이고, 솔레이마니가 이란 밖을 나왔을 때를 노림으로써 이란에 대한 직접 타격을 피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라크·시리아 철군을 내세워 당선됐고 올 대선에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 미국 언론들 사이에선 전쟁 의지보다는 ‘대선용 안보 장사’로 보는 시각이 더 많다. 일단 강공을 날린 트럼프 정부는 당분간 오만 같은 ‘중재국’들을 활용하면서 상황을 주시할 것으로 보인다.
이란도 선택지가 많지 않다. 경제는 무너졌고, 정치적으로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만한 상황이 아니다. 미국에서 이번 사건 뒤 민주당이 반발하고 70여개 도시에서 반전시위가 되살아나는 등 역풍이 불었듯이, 이란의 여론도 갈려 있다. 지난해 11월 이란에선 무능한 중도파 정부와 권위주의적 신정 통치를 겨냥한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강경진압으로 300명 이상이 숨진 이 시위에서 시민들은 이라크·레바논 일에 개입하는 혁명수비대에도 화살을 돌렸다. 솔레이마니가 명성을 누려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익 없는 팽창전략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도 만만찮았다. 다음달에는 총선도 예정돼 있다.
이슬람성지 곰(Qom)에 5일 복수를 다짐하는 붉은 깃발이 내걸리는 등 표면적으로는 ‘보복’을 외치고 있으나 이란이 안고 있는 문제는 미국의 공격보다 더 심각하다. 경제가 파탄으로 가는 걸 막는 게 급선무다.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우리는 위협에 맞설 것”이라면서도 “나라를 전쟁으로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 말했다고 이란 언론들은 전했다.
전면전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이란 밖에서 대리전 성격을 띤 충돌이 격화될 가능성은 높다. 가장 위험한 곳은 이라크다. 이라크는 미군 점령 뒤 새 정부가 출범한 이래 친이란계가 정권을 차지해왔다. 근래 이란의 지나친 개입 탓에 국민적 반감이 고조됐고 내부 갈등이 격화하던 참이었는데 미국의 이번 공격이 이라크 여론을 반미로 돌려버렸다. 카리스마 못잖게 논란도 컸던 솔레이마니를 미국이 순교자로 만들어준 셈이다.
특히 솔레이마니를 사살하는 과정에서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 부사령관도 목숨을 잃었다. 잠시 궁지에 몰렸던 민병대들은 4일 바그다드의 미군 시설을 로켓포로 공격하는 등 보복을 시작했다. 박현도 명지대 교수는 “미국이 반미 여론 속에 고립된다면 이란으로선 그 자체로 보복이고 승리”라고 분석했다.
이란은 레바논, 예멘 등에서도 친이란 무장조직들을 움직일 수 있다.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댄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친이란 무장조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화력을 자랑한다. 레바논과 이스라엘 모두 최근 정정불안이 심한 상태라, 헤즈볼라나 이스라엘의 작은 도발조차 복잡한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
이란과 밀착된 예멘의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시설을 공격하거나 호르무즈 해협에서 상선들을 위협할 수도 있다. 자칫 이런 상황이 ‘세계의 공적’이었던 이슬람국가(IS)에게 회생의 기회를 내줄 수도 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IS나 알카에다 잔당 같은 수니파 극단조직에 맞서 이란과 미국이 일종의 적대적 공생을 해왔는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전면 대결 모드로 들어가게 됐다면서 “수니 극단주의자들만 되살려주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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