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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아동 성학대' 지탄 받아온 교황청, '비밀유지법' 없앤다

딸기21 2019. 12. 23. 15:44

2019. 12. 18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달 21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의 국립경기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방콕 AFP연합뉴스

 

바티칸의 악명 높은 ‘비밀유지법’이 마침내 무력화됐다.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학대 등에 대한 비난 여론 속에서도 이 법을 근거로 숨기기에 급급해온 교황청이 마침내 세상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바티칸뉴스 등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17일(현지시간) 10여년 동안 세계 곳곳의 가톨릭 교구들에서 터져나온 사제들의 성학대 사건과 관련해 비밀유지법을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날 83번째 생일을 맞은 교황은 교서를 발표하고 특정 범죄행위에 대한 고발이 들어오거나 재판·결정 등이 있을 경우 비밀유지법을 더이상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특정 범죄’에는 미성년자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성적 학대들이 포함된다.

 

“가장 무거운 죄악”

 

바티칸의 다른 기밀들에 대해서는 비밀유지법이 계속 적용되지만, 성범죄와 관련해서 해당 국가의 법규에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바티칸이 세속법의 틀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사제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각국의 조사가 수월해지게 됐다. 사제들의 성학대를 조사해온 찰스 시클루나 몰타 대주교는 “비밀유지법은 정부나 희생자들에게 정보를 주지 않으려는 교회 관계자들에게 더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교황은 성직자들이 아동성착취 사진을 보거나 소지하는 행위를 ‘가장 무거운 죄악(delicta graviora)’으로 규정하기로 했다. 피에트로 파롤린 바티칸 국무원장이 이미 지난 4일 비밀유지법을 제한하는 교서와 아동성착취 범죄에 대한 교서에 서명했다고 바티칸뉴스는 전했다. 바티칸은 또 남성 성추행 혐의를 받아온 루이지 벤추라 프랑스 주재 대사의 사임도 승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월 24일 바티칸에서 열린 사제 성학대 범죄에 관한 주교회의 폐막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바티칸 AP연합뉴스

 

사제 독신주의를 고수해온 로마가톨릭에서 사제들의 성학대, 특히 아동들에 대한 성적 학대는 오랜 이슈였다. 아일랜드, 독일, 칠레, 미국, 폴란드 등 세계 여러 곳에서 사제들의 범죄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지만 바티칸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뒤 이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접근’을 할 것으로 기대됐으나 바티칸 내 보수파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교황 자신도 지난해 1월 칠레를 방문했을 때 성학대 혐의로 기소된 칠레 주교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해 비판이 쏟아지자 교황은 시클루나 대주교가 이끄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사건을 재조사했다.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뒤 칠레 주교들을 로마로 불러 ‘교회의 실패’에 대해 회의를 열었고 34명을 퇴임시켰다.

 

교황 퇴위 촉구 ‘내부 고발’도

 

이어 지난해 6월에는 뉴욕 대교구에서 시어도어 매커릭 추기경의 과거 성학대를 폭로한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었으며 워싱턴과 뉴워크 등 여러 곳에서 제기된 비슷한 사건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다. 펜실베이니아주 검찰의 수사에서는 1960년대 미국 내 6개 교구에서 300여명의 사제들이 1000명 넘는 아이들을 성학대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현재는 고위 성직자가 돼 있었다.

 

이 조사결과가 나오자 미국 주교회의를 이끄는 대니얼 디나도 추기경은 “도덕적 재앙”이라고 개탄했지만, 바티칸이 당국의 수사에 적극 협력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다. 미국 내 사제 성추행 등이 이슈가 된 지 오래됐으나, 2001년 교황청은 비밀유지법을 들어 수사당국에 협력하길 거부한 전례가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매커릭 추기경의 범죄 행위를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적절히 처리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내부 반발도 터져나왔다. 전직 워싱턴 주재 바티칸 대사인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가 이런 비판을 담아 프란치스코 교황의 퇴위를 요구하는 ‘고발장’을 발표한 것이다.

 

2월 23일 교황청 앞에서 사제 성학대 범죄 피해자들이 ‘바티칸의 침묵’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바티칸 EPA연합뉴스

 

교황은 이런 비판을 받아들여 올 2월 바티칸에서 사제들의 성학대 범죄를 논의할 주교회의를 소집했다. ‘약자들의 보호’라는 주제가 붙은 이 회의는 바티칸 사상 최초로 성학대 문제를 총체적으로 논의하는 고위 성직자 회의였다. 각국 가톨릭 최고의결기구인 주교회의 의장들은 이 회의에서 사제들의 책무, 성적 책임, 투명성의 세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교황은 폐회 연설에서 사제들의 아동 성학대를 “사탄의 도구”라며 강경한 어조로 비난했다. 유니세프가 실시한 28개국 가톨릭 아동성학대 조사보고서를 인용하기도 했다. 이 연설에 대해 교황청의 강력한 의지를 알렸다는 반응과, 여전히 미흡하다는 비판이 엇갈렸다.

 

폭로·소송 줄이을 수도

 

바티칸은 아동·약자에 대한 성적 학대를 막을 지침을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주교회의 한 달 뒤인 지난 3월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담은 바티칸법 개정안과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개정법은 바티칸과 각 교구에 성학대 사건들을 보고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했고, 피해자들을 보호할 의무도 규정했다. 이를 어길 경우 벌금과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도록 한 처벌규정도 담았다. 이어 5월에 교황은 가이드라인을 세계 가톨릭에 적용하기 위한 ‘당신은 세상의 빛(Vos estis lux mundi)’이라는 교서를 발표했다.

 

교황청이 사상 첫 성범죄 관련 주교회의를 소집하고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등 피해자들의 요구와 시대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으나,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많다. 교황청의 개혁 움직임에 따라 과거의 성학대 범죄들이 줄줄이 더 터져나올 가능성이 높다. 로이터통신은 미국인 사제 성학대 피해자 6명이 비밀유지법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입었다며 17일 뉴욕 법원에 바티칸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고 보도했다. 뉴욕주는 8월에 아동피해자법을 만들어, 수십년이 지난 사건이라도 아동이 피해자였을 경우 공소시효 없이 소송할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