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이라크에 이어 이란까지 반정부 시위가 번졌다. 휘발유값 인상으로 촉발된 이번 시위는 2009년 대선 부정선거 항의 시위 이래 10년만에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다. 레바논과 이라크의 반정부 시위도 사실상 ‘반이란 시위’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중동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개입해온 이란이 안팎에서 역풍을 맞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로이터통신 등은 이란 100여개 도시에서 휘발유값 인상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고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발단은 지난 15일 정부가 휘발유값을 50% 인상하고 한달 구매 상한을 60ℓ로 정한 것이었다. 이란은 세계 5위 안에 드는 석유·천연가스 보유국이지만 오랜 제재로 정유시설이 낙후해 늘 에너지난에 시달린다.
소셜미디어 차단에 대량 사망설...보수파는 “대통령 탄핵”
그간 이란 정부는 국내총생산(GDP)의 1.6%에 이르는 돈을 쏟아부으며 휘발유값을 보조해줬다. 보조금을 줄이고 기름값을 올려 재정을 충당하고 재투자하라는 것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사항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제재가 다시 강화된 것과 맞물리면서 갑작스런 대폭 인상 조치를 계기로 경제상황에 대한 분노가 터져나왔다. 15일과 16일 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전국 곳곳에서 주유소와 은행과 상점들이 불탔다. 중부 도시 시르잔에서는 15일 시위 때 1명이 숨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부는 조기진압에 나서 1000명 이상을 체포했다. ‘40명 이상이 진압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소문도 나돈다.
당국은 16일 오후 9시부터는 인터넷 접속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란은 미국의 제재 속에서도 외부와의 소통이 계속돼온 나라다. 2009년 대선 항의시위 때에도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시민들이 유혈진압 사실을 세계에 알렸다. 중도온건파인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나 핵합의 주역인 모하메드 자바드 자리프 외교장관, 최근 ‘보수의 아이콘’으로 이란 내에서 각광받는 아자리 자흐로미 정보통신부 장관 등은 트위터 애용자다. 그러면서도 이란 당국은 시민들의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등 접속은 통제해왔다. 시위가 퍼지자 당국은 왓츠앱이나 텔레그램 같은 해외 소셜미디어 사이트 접속을 차단했다.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17일 국영TV에 생중계된 연설에서 “관공서와 은행에 불을 지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폭도들이 불안을 조성하려는 행위”라며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했다. 모하마드 자파르 몬타제리 검찰총장은 “외국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있다”고 했고, 경찰청도 “외부의 적에 사주받은 자들이 안보 불안을 일으켰다”고 했다.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 수준 ‘긴축’…경제 한계 부딪쳤나
로하니 대통령은 17일 정부 회의에서 “국민들의 시위할 권리는 인정하지만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프레스TV 등이 보도했다. 로하니 정부는 휘발유값을 올리면서, 보조금을 줄이는 대신에 6000만명에게 매달 생활보조금을 주겠다는 ‘당근’도 제시했다. 휘발유 보조금은 중산층이 주된 수혜자이고, 기름을 덜 쓰는 서민층에게는 혜택이 적었다. 정부는 보조금을 줄이면 실제 직격탄을 맞는 사람은 200만명 정도로 파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로하니 대통령은 “제재를 받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석유 판매, 세금 인상, 보조금 삭감인데 앞의 둘은 어렵다”면서 “보조금을 삭감해 피해를 보는 이들을 월요일(18일)부터 당장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로하니 정부는 생필품을 살 수 있는 카드도 곧 주민들에게 발급할 계획인데,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시절의 긴축경제 때 취했던 조치들과 비슷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만큼 경제상황이 심각하고 재정난이 심하다는 뜻일 수 있다. 2010년 정부는 기름값을 4배로 올리면서, 빈민들에겐 매달 현금으로 보조금을 지급했고 오히려 빈곤율이 줄었다. 로하니 정부도 그런 조치를 취하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보수파 쪽에선 이번 사태를 악용해 로하니 대통령을 비롯한 온건파를 제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보수파들을 중심으로 60여명의 의원들이 로하니 대통령과 알리 라리자니 국회의장 탄핵안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시민 반발이 워낙 거세, 마즐레스(의회)가 결국 휘발유값 인상 계획을 철회시키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있다.
레바논·이라크 사태 개입에 시민들은 불만
미국이 이번 세기 들어와 대테러전과 일방주의를 밀어붙인 결과,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몰락하고 친이란 시아파 정부가 들어섰다. 이슬람혁명 이후 아랍국들 틈에서 고립됐던 이란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테러전으로 중동에서 미국의 위상이 추락하고 ‘힘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외부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 사태도 이란의 팽창을 도왔다. 이란 혁명수비대에서 대외 군사임무를 담당하는 알고드스 부대의 가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지난 몇 년 새 이라크와 시리아 곳곳에 출몰하며 친이란계 민병대를 키웠다. 시리아 내전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정권이 승리하게 하는 데에도 일조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조직 헤즈볼라까지 이어지는 ‘시아파 초승달’ 혹은 ‘시아벨트’가 형성됐다.
그러나 보수파들의 팽창전략은 역풍을 맞기 시작했다. 최근 레바논에서 벌어진 시위는 민주주의를 바라는 시민들의 요구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친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사실상 레바논 남부를 통치해온 헤즈볼라에 대한 반발도 겹쳐져 있다. 이라크 중부 시아파 성지에서 일어난 반이란 시위는 이라크의 친이란 정권마저 위협하고 있다.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직접 이라크 시위 진압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라크의 반이란 감정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란 내부에 있다. 핵합의로 잠시나마 숨통이 트였는데 다시 제재가 심해지자 시민들 불만이 커지고 있다. 다수의 시민들은 개혁과 개방을 바라지만 종교적 보수파들과 군부 특권층인 혁명수비대는 외부 군사행동에 치중해왔다. 로하니 정부는 보수파와 다른 노선을 추구하며 핵합의로 미국과의 관계를 풀려고 애썼으나,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일방적으로 합의를 깼다. 로하니 정부는 보수파들에게 역공을 당하고 휘둘리는 처지가 됐다. 로하니 대통령은 몇 달 전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를 향해 “핵을 바라는지, 국제사회와의 갈등이 계속되길 바라는지 국민투표라도 해보자”며 항의성 연설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에 죽음을” vs “체제 전복” 갈등 커지는 테헤란
내부가 불안정해지자 최근 보수파들의 사회 통제가 극도로 심해지는 분위기다. 테헤란 미 대사관 점거농성과 인질사건 40주년이었던 지난 4일 테헤란 시내에는 다시 “미국에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정부가 주도한 반미집회였다. 국내의 한 이란 전문가는 “보수파 인사들과 군·보안당국이 나서서 연일 반미주의를 고양시키고 있다”며 “미국은 이런 상황에서 이란 개혁파 정부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게 만드는 실책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봉쇄가 계속되고 있으나 인구 8100만명의 이란은 자급 가능한 구조여서 쉽게 경제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하지만 한번 ‘혁명을 해본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경제회복을 바라는 시민들을 언제까지 억누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이번 시위를 조기에 진압한다 해도 내부 모순은 더욱 곪아갈 게 뻔하다.
이틀 간의 시위에서는 ‘이슬람 체제의 전복’, ‘외부세력 지원 반대’를 외치는 구호들도 등장했다. 보수파들의 대내외 정책에 대한 총체적인 반대인 셈이다. 무기력한 로하니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아랍권 매체인 걸프뉴스는 “이란의 연료값 시위는 불가피했다”면서 “미국이 핵합의를 파기한 것이 한 요인이었지만 이란이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예멘 등에서 대리전을 벌이는 것에 대한 국민적 반감도 또 다른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이란 시위에 기름을 붓고 있다. 스테파니 그리셤 백악관 대변인은 17일 “미국은 이란 국민의 평화적인 반정부 시위를 지지한다”면서 “우리는 시위대에 대한 무력과 통신 제한을 규탄한다”는 성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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