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 블랙호크다운과 트럼프 시대의 인종주의  

딸기21 2019. 7. 22. 17:24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민주당의 흑인 여성 의원을 비난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대규모 집회에서 ‘유색인종’ ‘여성’ 정치인들을 향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그 와중에 난데없이 26년 전의 ‘블랙호크 다운’이 도마에 올랐다. 

 

1993년, 모가디슈의 미군들
 

발단은 미네소타주 연방 하원의원 일한 오마(36)가 과거 소셜미디어에 쓴 글이었다. 소말리아 이민자 출신인 오마 의원은 트위터에서 한 저널리스트의 글을 공유하면서 1993년 소말리아에서 벌어진 미군 작전으로 숨진 사람들 ‘수천명’을 언급했다. 오마가 글을 올린 건 2017년 10월이었는데, 최근 우익 언론들이 이를 집중 부각시키면서 2년이 지나 역풍을 맞았다.

 

일한 오마 미국 민주당 하원의원이 지난 18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국제공항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마 의원은 2년 전 트위터에 올린 소말리아 ‘블랙호크 다운’에 관한 글로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우파 정치인과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미니애폴리스 AP연합뉴스

 

미국인들은 당시 미군이 소말리아에서 숨진 사실만 기억할 뿐, 군사작전 와중에 숨진 소말리아인들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마가 말한 요지였다. 트럼프는 이를 놓고 “오마가 테러범들 편에 서서 미국을 비난했다, 블랙호크 다운과 관련된 미군들을 중상모략했다” “오마는 ISIS(극단조직 이슬람국가)에 들어가려는 자들을 동정하자고 말한다”고 비난했다. 오마의 트위터 글과 과거 발언들을 교묘히 짜깁기해 왜곡한 것이었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지만 20여년 전에도 소말리아는 무장군벌들이 판치는 나라였다. 1993년 미군은 ‘고딕서펀트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그곳에서 이슬람 군벌 모하마드 파라 아이디드 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을 벌였다. 미 육군 특수부대, 해군 특수부대(네이비실), 특수작전사령부 소속 대테러부대(델타포스) 같은 정예부대가 투입됐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민병대의 조악한 로켓추진수류탄(RPG) 공격에 블랙호크 헬기가 연달아 격추됐고 미군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시내에서 민병대가 미군의 시신을 끌고 다니는 영상이 공개되자 미국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당시로선 ‘베트남전 이래 미군이 입은 최대의 인명피해’였기에 파장이 컸다. 책과 영화로도 제작된 블랙호크 다운 사건은 왜 머나먼 나라에서 미군이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지, 탈냉전 시대에 미국의 군사개입 정당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그러나 오마가 지적했듯, 당시 소말리아인들의 인명피해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소말리아인 사망자 수에 대한 추정치는 ‘전투원 113명’에서 ‘민간인 포함 1700명’까지 다양하다. 수천명은 아닐지 몰라도, 사망자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미국의 소말리아인들
 

우파 정치인 뉴트 깅그리치는 “오마는 자신의 인권을 보호해주는 이 나라에, 모가디슈에서는 상상 못할 삶을 준 이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고 공격했다. 소말리아 군사작전에 참여했던 전역병들도 “우리는 오마의 부족을 무장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려 했던 것”이라며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오마가 알카에다를 찬양했다” “자기 남동생과 결혼했다”는 가짜뉴스까지 돌았다.

 

미국 워싱턴 의사당에 있는 일한 오마 민주당 하원의원 사무실 바깥 벽에 오마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메시지가 붙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오마를 비롯한 민주당 유색인종 여성 의원들을 겨냥해 “애국심을 기대할 수 없다”며 인종주의적인 공격을 쏟아냈다.  워싱턴 AFP연합뉴스

 

소말리아 소도시 바이도아에서 태어난 오마는 1992년 난민 신분으로 미국에 와 정착했다. 소말리아인들의 미국 이주는 멀게는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령 소말릴란드 선원들이 미국에 옮겨가 살기 시작했다. 1960~80년대에는 뉴욕 등지로 향한 유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1990년대 내전이 격화되면서 미국 이주가 크게 늘었다. 모델 겸 배우인 이만 압둘마지드, 소설가 누르딘 파라, ‘히잡 쓴 모델’로 유명한 할리마 아덴 등이 소말리아계 미국인들이다.
 

유입된 난민 상당수는 미네소타주에 터전을 잡았다. 소말리아 태생 미국인 숫자는 8만5700명 정도인데 그중 2만5000명가량이 미네소타에 산다. 미 국무부와 난민 정착 협약을 맺은 미네소타 주정부가 소말리아인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후 20여년이 지나 미네소타는 소말리아 출신 첫 연방 의원을 배출했다.
 

그사이 소말리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1990년대 빌 클린턴 정부가 군사개입을 했을 때 수단과 소말리아는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온상이었다. 이들을 제거하려는 작전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근래에는 알카에다에 뿌리를 둔 무장집단 알샤바브가 소말리아를 근거로 활동하고 있다. 알샤바브는 2011년 아프리카연합(AU) 공동작전으로 모가디슈에서 쫓겨났지만 그 후에도 테러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인 1명을 포함해 71명의 목숨을 앗아간 2013년 9월 케냐 나이로비 쇼핑몰 폭탄테러도 이들이 저질렀다.

 

모가디슈의 용병업체들
 

알샤바브 전투원 수는 5000~7000명으로 추정된다. 미군 아프리카사령부에 따르면 지난해 미군은 소말리아에서 47차례 공습을 실시해 326명을 사살했다. 올해는 4월까지 30차례 공습을 했고 255명이 사망했다. 미군 아프리카사령부는 이들이 모두 알샤바브 전투원이라 주장한다. 이 문제는 논란거리다. 지난 3월 인권기구인 국제앰네스티는 지난해 10월 이후 적어도 13건의 미군 공습에서 무고한 이들이 숨졌다는 자료를 냈다. 아프리카사령부는 “2017년 6월 이후 110차례 공습으로 테러범 800명을 제거했지만 민간인 사상자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민간인 피해가 적지 않다고 말한다.

 

 

민간기구인 국제위기그룹(ICG)의 브리타니 브라운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유엔과 구호기구들은 내전과 공습과 사막화가 겹치면서 미군 작전지역에 거주하는 소말리아인들이 집을 떠나 흩어지고 있다고 전한다.
 

소말리아에서 미군 작전이 늘어난 것은 버락 오바마 정부 때부터다. 오바마 정부는 소말리아 군사작전 제한을 크게 완화했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뒤 미군의 공격은 더 늘었다. 트럼프는 취임 직후 소말리아를 “적대행위가 만연한 지역”이라 부르며 사실상 전쟁지역으로 규정했다. 지난 4월에는 소말리아를 ‘비상사태 지역’으로 선포한 대통령 포고령을 1년 연장했다. CNN방송은 소말리아에서 미군의 임무가 최소 2026년까지 계속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미군의 목표는 알샤바브를 소탕하는 것과 함께, 소말리아 정부의 ‘대테러 능력’을 높이는 것이다. 미군뿐 아니라 미군과 계약한 컨트랙터들, 즉 민간군사회사(PMC)들도 대거 이 미션에 참여하고 있다. 밀리터리타임스 5월21일자 기사를 보면 현대판 용병업체인 컨트랙터들은 ‘다나브’ 혹은 ‘번개여단’이라 불리는 대테러 전투부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부대 규모는 450~500명인데, 1999년 지뢰를 제거하겠다며 들어간 밴크로프트라는 민간기구가 현지에서 새로 회사를 차리고 이 부대의 병력 모집과 훈련을 떠맡았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처럼 소말리아도 미군과 계약한 군사기업들의 돈벌이 무대가 됐다.

 

트럼프 유세장의 백인들
 

트럼프는 오마가 “알카에다는 자랑스러워하면서 미국에 대해선 그렇지 않은 모양”이라고 했다. 물론 트럼프가 오마에게만 특별히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21일에도 오마를 비롯해 민주당의 유색인종 여성 초선의원들을 겨냥한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4명의 여성 하원의원이 우리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썼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7일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의 윌리엄스아레나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은 소말리아 난민 출신인 민주당 일한 오마 하원의원 등을 향해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며 인종주의적인 구호를 외쳤다.  그린빌 AP연합뉴스

 

트럼프의 선동이 본격화된 지난 14일 이후로 “돌아가라(Go Back)”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집회 슬로건이 됐다. 오마는 소말리아 태생이지만 라틴계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팔레스타인 난민 2세인 라시다 틀라입, 흑인인 아이아나 프레슬리 의원은 모두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들에게 “너희 나라로 가라”고 말한다. 트럼프가 2016년 대선 때부터 써먹어온 이민 반대와 마이너리티 비방 전략은 이제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 전반으로 퍼졌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팬들이 인종(주의)의 불을 붙였다”고 썼다.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매코널, 하원 원내대표 케빈 매카시, 대선 후보를 지낸 미트 롬니 등이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발언과 정책들을 지지한 것도 중요한 변화다. 지난 대선 때만 해도 트럼프는 공화당의 아웃사이더였다. 지금은 다르다. 트럼프가 부추기면 공화당의 주류 정치인들이 따라가며 받쳐준다. 잡지 살롱은 “지금의 공화당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위험한 백인 인종주의 조직”이라면서 ‘백인 정체성 정치’ ‘화이트 백래시(백인의 반격)’라고 진단했다. 지난 2월 유고브 여론조사에서 미국 흑인 75%는 “트럼프 집권 뒤 인종주의가 더 심화됐다”고 대답했다. 특히 오마는 아프리카 난민 출신에 ‘불충한 무슬림’인 데다 여성이라는 젠더 요인까지 덧씌워져 난타를 당하고 있다.

 

 

오랫동안 블랙호크 다운은 미국인들에겐 충격과 수치의 상징이었다. 냉전이 끝난 뒤 조지 H W 부시의 걸프전을 통해 단일패권 시대를 선언했건만, 블랙호크와 함께 미국의 위신은 추락했다. 냉전시절 키워놓은 이슬람 극단세력의 반격에 미국이 나가떨어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 것이자, 세계경찰의 능력 부족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블랙호크 다운이 자랑스러운 과거로, 소말리아인들이 감사해야 할 일로 떠올랐다. 인종주의가 불러낸 과거의 유령이 21세기의 미국을 공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