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상]대통령이 할 일, 민주노총이 할 일  

딸기21 2018. 7. 24. 19:53

한낮의 기온은 40도 가까이 치솟고. 남쪽 바다는 아열대로 바뀌어가고. 추위도 더위도 불평등해서, 힘든 사람은 이 폭염을 더 힘들게 견뎌내야 하고. 여전히 거리엔 천막 하나 펼쳐 놓고 농성 중인 사람들이 남아 있고. 기록적인 무더위라는 이 여름의 풍경들. 그래도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과 KTX 해고 승무원들 문제처럼 오래도록 끌어온 이슈들이 해결되는 걸 보면서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실감한다.

 

누군가에게는 성에 차지 않을 것이고,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미완의 승리이자 부족한 타협책일 터다. 그래도 그 고통에 사회가 공감했고, 지난한 세월의 마무리를 짓게 됐다는 건 말 못할 아픔 속에 거둬낸 성과다. 그 힘든 싸움을 해낸, 이겨낸 분들을 ‘피해자’라는 말로 표현하는 건 어쩐지 죄송스럽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쌍용차 문제도 있다. 쌍용차에서 해고된 이들은 5년만에 다시 분향소를 세우고 고통의 여름을 맞고 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지난 13일 서울 청와대 앞에서 최저임금 개악 폐기 결의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영민 기자


노동 이슈는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반가운 소식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꼬이면서 노사정 대화는 물 건너간 듯하고, 액수를 정하는 과정에서 업종별·계층별·고용형태별 간극이 두드러졌다. 문재인 정부의 ‘우경화’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그 논의의 와중에 무엇보다 민주노총의 존재감이 적었다. 협상의 전략과 기술은 보이지 않았고, 공을 이리저리 튕기는 것처럼 비쳤다. 거리로 나섰지만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는 공허하다. 실리도 못 챙기고 명분도 없었다. 정규직화, 최저임금 모두 ‘대통령바라기’만 한 것같다. 노사가 머리 터지게 싸우고 협상해서 어려운 사람에게 좀 더 몫이 돌아가게 해야 했던 것 아닌가 싶다. 

 

대통령에게 “공약을 지켜라”라고 말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공약을 지키면 모든 문제가 풀릴까? ‘모든’이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 되겠다. 가장 심각한 비정규직 문제, 일자리가 불안하고 살만큼 돈도 못 버는 그들 문제가 풀릴까? 노동시간도 최저임금도 고용안정도, 하다못해 무더위 속 휴식시간도, 누구보다 비정규직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인데. 대통령은 정치인이고, 공약을 지키지 않으면 지지율과 표로 심판받으면 된다. 하지만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그들을 대표하는, 대표해야 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제대로 내주지 않는다면?

 

내년 최저임금 인상률 10.9%가 높다는 사람도 있고 낮다는 사람도 있다. 수치를 놓고는 논란이 있겠지만 민주노총이 비정규직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는 최저임금 협상장에조차 들어가지 않은 것을 옹호하기는 힘들다. “임금교섭에 장외투쟁이 어디 있냐. 결국 최저임금은 자기네 일이 아니었던 거 아니냐. 여성노조도 알바노조도 다 (협상에) 들어오라고 했는데.” 오랜만에 만난 한 노동운동가의 말은 신랄했다. “그럴 거면 문재인을 위원장으로 옹립하든지.” 비정규직들 위해 힘을 다해 협상하는 대신에 대통령 공약만 붙들고 있는 민주노총이 안타까워 던진 말이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들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한지 1년이 됐다. 비정규직 문제를 조금이나마 풀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 정부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물론 성과도 있고 한계도 있다. 무조건 정규직을 늘리는 것이 능사도 아니다. 차별을 없애고, 사회 전체의 희망을 갉아먹는 양극화를 줄이는 것이 본질이다. 그런데 정규직화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어디에 있었나. 지적하고 고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끌고가야 했다. 전교조도 마찬가지다. 법외노조 딱지를 떼달라는 얘기만 한다. 물론 교사들의 노조할 권리는 보장해야 한다. 그런데 기간제 교사들이나 학교 비정규직 얘기만 나오면 참교육 교사들과 밥그릇 이기주의자들의 이해관계가 합쳐진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다수를 차지하는 기간제 교사들은 이들의 반대 때문에 ‘무기계약직’조차 될 수가 없다.

 

정부를 향해 약속을 지키라면서, 이젠 민주노총이 발목 잡는 존재로 손가락질 당할 판이다. 노사정이 머리를 맞댈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대화에 복귀할 명분을 찾기도 힘들어 보인다. 개악된 최저임금법은 개정을 추진하고, 임금체계도 손보고, 노동시장에서 밀려나고 소외된 소상공인들 절박한 사정도 같이 논의하고, 재벌기업들을 상대로 사회 전체를 위한 비용을 받아내는 일들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하려면 누군가는 노동자들의 대표가 돼야 한다. 민주노총이 그런 조직이다. 조직률 10%의 단체라 하지만 역사적·사회적으로 그런 대표성을 인정받아온 조직이다. ‘촛불 정부’를 이용하는 것도 민주노총의 능력이다. 어느 정부든 시간이 지나면 레임덕에 우경화가 온다. 느슨해지기 전에 일하는 사람들 살만하게 만드는 것, 정부를 그런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은 민주노총의 몫이다. 유연하면서도 안정된 고용구조를 만들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점점 늙어가며 또한 점점 유동적이 되는 사회에 맞는 고민을 보여주는 것. 원하든 원치 않든 노동운동의 시대적 사명에 응하지 못하면 민주노총은 역사의 유물이 돼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