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statelessness, 국적이 없다는 것

딸기21 2017. 6. 26. 16:26
728x90

statelessness.

복잡한 단어로군요. 

국적이 없다는 것.

무국적 상태.
'상태가 없다'는 뜻도 되겠네요. 국가와 국경이 엄존하는 시대에, 국적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합법적인 상태에도 속하지 않는, 그야말로 '상태 없음'이 돼 버리니까요.
존재하지만 존재가 없는 사람들.

지난 20일이 세계 난민의 날이었지요. 난민 기사만 나오면 비난 댓글이 수백개씩 달립니다만, 차근차근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살기 팍팍하고 앞날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들, '누군가가 내 것을 빼앗아가려 한다'고 덮어씌우기라도 하지 않으면 분노가 풀리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난민은 그나마 '보이는 존재들'입니다. 세계에는 200개 가까운 나라가 있고,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은 어느 나라엔가 소속돼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에서 1000만 명이 어떤 국적도 없이 살아가며, 10분마다 한 명씩 국적 없는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이들 중에는 국가의 탄압 속에 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해 ‘무국적자’가 된 이들도 있고, 난민의 자녀로 태어나 출생신고를 하지 못해 국적 없이 자라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국가로부터 시민임을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들도 포함됩니다.


국적이 없다는 것, 어떤 곳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이들은 정부나 국가기구 혹은 사회가 주는 혜택과 보장을 누리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지요. 이들은 평범한 시민들이 갖는 기본적인 인권조차 부정당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이런 사람들에게 ‘소속’을 주자는 ‘나는 소속돼 있습니다(I Belong)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Antonio Manuel de Oliveira Guterres 현 사무총장이 유엔난민기구 대표이던 2014년 11월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면서 캠페인을 출범시켰습니다. 


구테흐스는 당시 공개서한에서 “국적이 없는 상태 statelessness 라는 것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의학적인 도움도 받지 못하며 합법적으로 고용되지도 못하는 삶, 자유로이 이동할 수도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삶을 뜻한다”며 “이제는 이런 상태를 근절시킬 때”라고 했습니다.


세계의 대부분의 무국적자들은 민족·종교·혹은 성별 때문에 차별을 받고 사회적으로 배제돼 있는 사람들입니다. 난민기구에 따르면 27개국이 여전히 여성들을 시민·국민으로 인정하고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유엔은 이미 1954년 ‘국적 없는 사람들의 지위에 대한 협약’을 채택했습니다. 


그 후 수십 년에 걸쳐 배제돼 있던 사람들을 국민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각국의 조치가 잇따랐습니다. 2008년 방글라데시 법원이 파키스탄 출신 우르두어 사용자 30만 명에게 시민권을 준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서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도 주변국들로부터 이주해와 장기간 거주해온 사람들에게 2013년 국적을 줬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은 소련이 붕괴된 뒤 무국적 상태로 남아 있던 6만5000명을 2009년 국민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무국적 상태인 이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이유는 제각각입니다. 대량학살에 가까운 참사가 이어지고 있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내전 때문에 국가 시스템이 사실상 붕괴된 시리아에서는 전쟁이 직접적인 원인. 분쟁지역을 탈출한 부모들에게 국적이 있었다 해도 피란지에서 태어난 난민 자녀들은 무국적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여러 정치적, 사회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메흐란 카리미 나세리 Mehran Karimi Nasseri는 이란 출신 망명자였습니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18년 가까이 살았던 나세리의 사연은 1994년 프랑스에서 영화로 만들어졌고, 2004년 미국 영화 ‘터미널 The Terminal’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셰레메티예보 Sheremetyevo 국제공항에 머물렀던 이란 출신 자흐라 카말파르 Zahra Kamalfar의 사정도 비슷했습니다. 나세리는 프랑스에, 카말파르는 캐나다에 망명하려다가 공항에 발이 묶였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박해를 피해 떠나왔지만 가고픈 나라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두 사람에게 ‘국가의 보호’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지구는 정처 없는 행성이었습니다.

 

난민 심사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무국적 상태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사연을 늘 관심을 끕니다. 하지만 국적 없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평생을 보내고 자식들까지 국적 없이 키워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도미니카공화국은 중미 카리브해의 이스파니올라 Hispaniola 섬에 있습니다. 섬의 서쪽 절반은 아이티, 동쪽 절반은 도미니카입니다. 도미니카에는 가난과 독재를 피해 넘어온 아이티 사람 8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도미니카는 미국처럼 속지주의 국적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 땅 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 시민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2013년 6월 법원은 “이동 과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속지주의를 적용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를 테면 도미니카에 살러 온 것이 아니라 주재하러 온 외국 외교관 자녀들이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도중에 잠시 머물게 된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도미니카 국적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법은 곧 아이티 아이들을 배제하는 쪽으로 확장됐습니다. 1929년 이후에 도미니카로 넘어온 아이티 이민자의 아이들에게는 국적을 부여하지 않는 것으로 법이 바뀌었습니다. 20만 명이 졸지에 무국적 신세가 됐습니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서로 이웃한 동유럽 나라들입니다. 1940년부터 소련의 일부분이었다가 1991년 나란히 독립을 했습니다. 두 곳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각기 두 나라 시민권이 주어져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소련에 합쳐져 있던 시기를 일종의 ‘점령기’로 규정했습니다. 라트비아는 1940년 6월 18일, 에스토니아는 같은 해 6월 16일을 기준 삼아 그 이전부터 살아온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우선적으로 국적을 부여했습니다. 그 이후 51년 동안 ‘이주해온’ 사람들에게는 이민자로서 국적취득 절차를 밟게 했습니다. 에스토니아어, 혹은 라트비아어 시험도 치렀습니다. 독립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의 경우, 부모 중 한 명이라도 국적을 가지고 있어야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인’은 배제됐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국적 취득을 포기했습니다. 러시아는 국적 없는 옛 소련권 국가 국민들에게 비자 면제권을 줬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연고가 있는 러시아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반면, 에스토니아나 라트비아 국적을 얻으면 러시아 입국 때마다 비자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무국적 상태로 남았습니다. 라트비아에 사는 사람의 12%, 에스토니아에 사는 사람의 6%가 지금도 국적이 없다고 합니다. 법적 보호 대신 이동권을 택한 셈입니다.


그리스 민법에는 과거에 “그리스 민족 혈통이 아닌 사람이 귀환할 생각 없이 국가를 떠날 경우 국적을 잃을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 법규 탓에 6만 명이 국적을 잃었습니다. 이를 테면 그리스계가 아닌 국민이 나라 밖으로 나가면서 귀환 의사를 어떤 형태로든 입증해놓지 않으면 국적을 빼앗는 식이었지요. 키프로스에서 터키계와 그리스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터키와 그리스 두 나라가 개입을 하면서 양측의 감정은 매우 악화됐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터키계 자국민이 터키를 잠시 방문하러 가기만 해도 국적을 빼앗곤 했습니다. 그 때 악용한 것이 민법 19조, 위에 적은 조항이었습니다.


이 조항은 민족에 따라 시민권 규정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라는 비판 탓에 1998년 폐지됐습니다. 하지만 민족주의 차별정책 속에서 여전히 그리스에는 300~1000명의 무국적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들 중에는 외국에 나간 적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트라케 Thrace 지역에 살고 있는 터키계들입니다. 국적 없는 이들은 건강보험이나 교육 기회를 빼앗깁니다. 정부는 이들에게 국적을 주겠다고 누차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인도령 잠무카슈미르 사람들은 영토 분쟁에 끼여 툭하면 양국으로부터 스파이 취급을 받곤 합니다. 인도는 분리운동을 하는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고문, 체포하기 일쑤이고요. 파키스탄으로 넘어갔다가 국경통과 절차를 위반해 ‘인도 스파이’로 몰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 적을 두고 있지만 인도령 잠무카슈미르에 넘어가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양국의 경계는 불분명하고, 카슈미르 사람들은 국적에 관계없이 인척관계로 엮여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인도는 위협수단으로 구금 중인 카슈미르인들의 국적을 빼앗는 일이 잦습니다. 그런가 하면 파키스탄은 자국 대사관에 등록하지 않은 채 외국에 7년 이상 나가 있는 사람들은 국적을 박탈합니다. 그렇게 해서 카슈미르에는 무국적자들이 생겨납니다.


2012년 BBC방송은 무함마드 이드리스라는 사람의 사연을 보도했습니다. 이드리스는 파키스탄 카라치에 살았습니다. 1999년 2박3일 비자를 받아, 아내와 네 아들은 남겨두고 혼자서 인도 칸푸르 Kanpur에 사는 병든 부모를 방문했습니다. 그랬다가 인도 당국에 체포됐고, 13년 동안 수감돼 있었습니다. 


중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장기수가 돼야 했던 것은 사법 절차가 엉망이어서 한없이 심리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사법 실패’와 그 배경에 있는 양국 간 외교갈등이 한 사람의 인생 13년을 잡아먹은 겁니다. 그의 인권은 철저하게 묵살 당했습니다. 파키스탄도 그의 삶에 관심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드리스의 파키스탄 여권은 2003년에 만료됐고, 그는 국적을 잃었습니다. 인접한 네팔에는 무국적자가 10만 명이나 됩니다. 네팔에 사는 부탄계 10만 명은 네팔인도, 부탄인도 아닌 채로 살아갑니다.

 

쿠웨이트의 사막 지대에는 베둔 Bedoon 또는 비둔 Bidun 이라 불리는 아랍계 유목민들이 있습니다. 2011년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이들 중 10만6000명이 쿠웨이트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63쪽 분량의 보고서를 냈습니다.


움 왈리드라는 당시 43세의 과부는 “사망한 남편과의 관계를 입증할 서류가 아무 것도 없다”고 휴먼라이츠워치에 호소했습니다. 법적으로는 그가 결혼을 했는지, 누구와 했는지, 남편이 죽었는지, 죽은 남편의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가 있는지 입증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오늘날의 쿠웨이트가 왕국으로 성립된 것은 1613년입니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아랍 전역에 흩어져 살아왔고 쿠웨이트 땅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둔은 아랍 전역에 흩어져 있는 베두인 Bedouin 유목민의 일부입니다. 1961년 영국 보호령에서 독립한 쿠웨이트는 석유 자원 덕에 세계 최고 부국 중 하나가 됐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베둔족을 합법적 기록이 없는 ‘불법 체류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베둔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빈곤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삶을 택한 게 아니라, 국적을 달라 해도 정부가 주지 않는 겁니다. 2016년 기준으로 이 나라에 거주하는 사람은 420만 명에 이르지만 그 중 쿠웨이트 시민은 280만 명뿐입니다. 나머지는 네팔 등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나 주변 아랍국 출신들을 비롯한 외국계 이주자들입니다.


2011년 2월과 3월 베둔족이 시위를 했습니다. 정부에 시민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였습니다. 이들은 출생, 결혼, 사망 증명서를 내주고 의료보장과 교육과 고용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신분증이 없는 베둔족은 재산 소유권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거주이전의 자유도 제한됩니다. 살던 곳에서 쫓겨나 사막 여기저기로 밀려다니는 일도 비일비재하고요. 


정부는 국제사회의 압력에 밀려 ‘베둔 위원회’를 만들고 불법체류자해결중앙시스템 Central System to Resolve Illegal Residents‘ Affairs이라는 걸 형식상 구축한 뒤 무국적 상태의 베둔족들을 개별적으로 조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위원회는 베둔족들의 국적 취득 신청을 대부분 거부했습니다. 이들에게 쿠웨이트가 아닌 다른 ‘진짜 국적’이 있다는 핑계로 심사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베둔족은 자기네 공동체 안에서 통용되는 신분증을 발급받았지만, 그조차 없는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증명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한 가족 내에서 신분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휴먼라이츠워치가 소개한 움 압둘라라는 여성에게는 네 명의 손주들이 있습니다. 손자 1명은 정부의 교육보조금을 지급받았지만 나머지는 못 받았으며 학교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베둔족들을 위해 지어진 학교라 해도 교육이 질이나 시설은 형편없습니다. 


합법적으로 취직할 기회가 없는 베둔족들은 거리에서 채소를 팔거나 자동차 수리업체, 세탁소 등에 ‘불법 고용’돼 일하는 일이 많습니다. 자기 가게를 열려면 신분증 있는 친구나 친척의 이름으로 허가를 받고 그들 이름으로 사업을 해야 합니다.


1960~70년대 쿠웨이트 정부가 베둔족에게 시민권을 일부 인정해준 적도 있었지만 당시에도 투표권은 주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에 테러공격이 늘어나고 정정이 불안해지자 테러와 아무 관련 없는 베둔들이 배척 대상이 됐습니다. 신분을 인정받았다 해도 공립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공무원이 될 길도 막혔습니다. 정부는 베둔족 대다수를 이웃나라에서 넘어온 불체자로 규정하고 기존에 존재하던 기록도 없앴습니다.


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공격했고,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라크를 공격하며 걸프전을 일으켰습니다. 베둔족은 이 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도 처지가 더 악화됐습니다. 쿠웨이트는 베둔족이 이라크에 협력했다고 비난했으며 쿠웨이트 사회에 통합돼 있던 베둔족들마저 다시 축출했습니다. 2010년 11월 정부는 “5년 내 이 문제를 풀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국가란 무엇일까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