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말레이시아, 화교, 공산주의

딸기21 2017. 3. 1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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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가 국제 이슈의 무대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한동안 김정남 피살사건 때문에 시끄러웠죠. 말레이시아가 최근에 세계 뉴스에 등장한 것은 3년 전 사라진 MH370 여객기와, 뒤를 이어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MH17 여객기 격추사건 때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김정남 사건 취재 다녀온 심진용 기자의 말로는, 말레이시아 현지 기자들도 "MH370 사건 이래 최대 뉴스였다"고 했다는군요.


김정남에 관한 뉴스들 확인하느라고 현지 신문들 많이 훑어봐야 했는데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소스가 화교들이 만드는 중국어 신문들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직접 훑어본 것은 아닙니다;; 중국어 못함... 그러나 내겐 중국어를 하는 후배가 있지)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생각난 김에 정리하려고요. 말레이시아의 화교들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 때 말레이계 주민들의 타깃이 돼 보이콧이나 상점 공격 같은 일을 겪기도 했고(인도네시아에서가 훨씬 심하긴 했습니다만) 정치적, 사회적으로 적잖은 차별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20세기 내내 이어져 온 '공산주의와의 싸움'이 있었던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요. 말레이시아 중국계를 둘러싼 아픈 역사의 배경에는 중국계가 주축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의 게릴라전,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거기에는 또 식민주의와 플랜테이션의 역사가 뒤섞여 있고요.


공산주의 게릴라 거점을 폭격하는 영연방군 소속 호주군 전투기. _ 위키피디아



말라야(말레이) 지역에 중국인들이 건너간 역사는 매우 오래됐습니다만, 한나라 때부터 이어져온 이민의 역사는 생략하고요. '말라야 봉기 Malayan Emergency'라는 사건부터 들여다볼까요. 현지에서는 다루라트 Darurat라고 부르는 게릴라전이 1948년부터 1960년까지 계속됐는데, 그 주축이 말레이공산당의 무장부대인 말라야민족해방군(MNLA)이었습니다. 이 게릴라전을 '말라야 봉기'라고 명명한 것은 영국 식민통치 당국이었습니다.


1957년 독립 뒤로 말레이는 다른 동남아 국가들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높은 성취를 이뤘고, 지금도 주변국들보다 잘 삽니다. 김정남 사건 때 보니 경찰력도 매우 훌륭하더라는... 하지만 독립 이전 말레이는 열강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대개 그랬듯이 고무와 주석 따위를 생산하는 원자재 공급처였습니다. 빈농들은 영국으로 수출될 고무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땅 잃은 사람들은 광산에서 일했습니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 저항하고 일어선 것이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1948년 5월 16일, 프락 지역의 숭가이 시풋에서 플랜테이션 농장 관리자 3명이 저항세력에 살해됐습니다. 영국 식민당국은 비상사태법을 만들어 진압에 나섰습니다. 말레이공산당을 비롯해 좌파 정당들은 불법화됐습니다. 공산당 지도자 친펑은 농촌으로 퇴각해서 민족해방군을 결성하고 게릴라전에 나섭니다. 이들은 플랜테이션 농장과 주석 광산 등 식민당국의 생산시설을 공격했습니다.


반제국주의 해방투쟁을 내세운 이들의 뿌리는 일본 점령에 맞선 저항군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영국은 일본이 말라야를 점령하자 공산당이 주도하는 반일말레이민족군(MPAJA)의 싸움을 지원해줬습니다. 제국주의 열강들끼리 싸울 때 흔히 벌어지는 일이지요. 하지만 반일민족군은 일본 점령이 끝난 뒤에도 해산하지 않았고, 수천 명이 남아서 이번엔 영국에 맞선 싸움에 들어간 겁니다.


반영 투쟁이 전개될 당시 말레이 인구 300만명 중 약 50만명이 중국계였다고 합니다(다만 이런 통계는 정확하지는 않고 대략적인 추산치입니다). 당시 말레이 사람들 대개가 그랬듯 중국계도 대부분 농민이었습니다. 이들이 공산당과 민족해방군의 버팀목이 돼줬습니다. 공산당은 특정 민족집단의 이해관계를 내세운 조직이 아니었고 내부에는 말레이계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계, 인도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 비례로 볼 때에 공산당과 민족해방군에서 중국계 비중이 매우 컸던 것은 사실입니다. 식민통치 시절에도 차별을 받았던 중국계가 상대적으로 공산군을 지원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싸움을 이끈 친펑 역시 중국계로, 본명은 옹분화(王文華)입니다.


맨 왼쪽이 친펑입니다. AP



영국 군대는 정글을 무대로 한 게릴라전을 진압할 때 흔히 취하는 방식의 작전을 택했습니다. 해롤드 브릭스 장군이 만든 '브릭스 플랜'이 기본이었습니다. 군 부대를 투입해 정글에서 전투를 하는 동시에, 게릴라들에게 '보급'을 해주는 민간인들을 막기 위해 주변 마을들을 제거했습니다. 정글 주변에 살던 주민 50만명 가량이 급조된 '새 마을'로 강제이주를 당했습니다. 이주당한 사람 중 40만명이 중국계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영국이 정글에 투입한 부대 중에는 네팔에서 데려온 구르카 용병들도 있었습니다. 20세기 영국군이 개입된 모든 군사작전에 참여한 ANZAC 즉 호주와 뉴질랜드 병사들도 동원됐습니다. 멀리 태평양의 피지와 남-북 로디지아(오늘날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짐바브웨)에서까지 병사들을 끌어왔습니다. 버마의 밀림에서 2차 세계대전 때 작전을 벌인 적 있는 로버트 그레인저 톰슨 장군이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게릴라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전투원 규모는 7000~8000명 정도, 영국군은 대략 4만명 규모였다고 합니다.


게릴라전의 배경은 사람들의 생활고였지요. 1951년 영국군은 게릴라 초토화작전을 벌이는 한편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식량과 의약품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공산주의 반군은 생명줄이 끊기자 결국 주민들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전세가 역전됐습니다. 그 해 10월에 MNLA는 영국 식민정부 집행관 헨리 거니를 매복 공격으로 살해했습니다. 공산 반군의 민간인 납치와 살해가 빈번해지던 차에 이런 일이 일어나자 여론이 등을 돌렸습니다. 반군은 전략을 재검토했고, '10월 결의'라 불리는 일종의 새 전략을 추구하게 됩니다. 민간인이나 경제 시설에 대한 공격을 줄이고, 식민통치 기구를 겨냥하며, 정글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식량을 스스로 보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게릴라전은 몇 년을 더 끌었습니다. 1948년 출범한 말레이 연방은 1957년 독립을 선언합니다. 반군은 독립 이듬해에 투항했고, 게릴라전은 1960년 공식 종료됐습니다. 이 분쟁으로 게릴라 6710명이 숨졌고 말레이군 1345명과 영연방 군인 519명, 민간인 약 25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전쟁 기간 숱한 반인도 범죄가 벌어졌습니다. 영국군은 베트남에서 미군이 했듯이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했고, 공습을 통해 엄청난 화력을 정글에 퍼부었고,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반군은 사보타주와 파괴작전, 민간인 납치 살해를 저질렀습니다. 


1989년 12월 2일 태국에서 핫야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모습.



여기까지가 '1차 말라야 봉기'입니다. 식민통치에 맞선 공산주의자들의 싸움은 독립과 함께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중국발 공산주의의 물결이 말레이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농촌을 기반으로 한 마오주의 혁명 바람이 분 것이죠. 중국을 방문해 덩샤오핑을 만나기도 했던 친펑은 1968년 1월 다시 봉기를 선언합니다. 2차 말라야 봉기의 시작입니다.


이듬해 말레이 정부는 영국의 특수부대를 본뜬 VAT69라는 부대를 만들어 게릴라 소탕작전에 들어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70년에는 공산당 안에서 내분이 일어납니다. 무장 부대들끼리 서로를 정부의 스파이로 몰아붙이며 싸웠고, 당내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파벌(CPM-ML)과 혁명파벌(CPM-RF) 간 권력투쟁이 벌어졌습니다. 


말레이 정부는 영국의 작전에서 교훈을 얻어, 민간과 공산 반군의 고리를 끊기 위한 농민 지원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케스반(KESBAN)이라 불리는 치안-개발 정책이었습니다. 반군을 지원하는 중국을 정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작업에도 들어갔습니다. 말레이는 1974년 중국과 수교했고, 중국과 게릴라들의 고리를 끊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1981년 7월 집권한 마하티르 모하마드는 2003년까지 무려 22년간 총리를 지냈지요. 마하티르는 오랜 협상 끝에 1989년 12월 마침내 태국에서 반군과 '핫야이 평화협정 Peace Agreement of Had Yai'을 맺었습니다. 게릴라전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현재 중국계는 말레이 인구의 25% 정도를 차지합니다. 독립 이전에는 3분의 1 가량이 중국계였다는데,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2014년 센서스에서 중국계의 평균 소득은 말레이의 어떤 민족집단보다도 높았습니다. 2015년 조사에서 말레이의 10대 부자 중 8명이 중국계였다고 합니다. 말레이 사람들 사이에는 "장사를 잘 하는 중국계가 돈을 번다"는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몇몇 중국계 부자들의 존재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중국계의 정치적 발언권은 낮습니다. 정치는 거의 말레이계의 독무대입니다. 경제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말레이 경제를 쥐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말레이계입니다. 1970년대에 시행된 신경제정책(옛소련의 신경제정책과 이름이 같은 NEP)은 말레이계에 경제 파워를 몰아줬습니다. 국영기업들은 물론이고 주요 민간기업에서도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은 말레이계입니다. 


일본에서 발간되는 아시아지역 외교전문지 더디플로맷 2015년 기사에 '말레이의 가난한 중국계 주민들'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중국계의 평균 소득이 높고 중산층이 많다고는 하지만 중국계 안에서의 경제 격차는 국가 전체의 불평등보다 훨씬 심하다고 합니다. 신경제정책의 영향은 여전히 살아 있고, 정부의 빈곤층 지원조차 말레이계에 많이 주어집니다. 민족집단을 차별한다는 비판이 일자 정부는 1990년대에 '방사 말레이시아 Bangsa Malaysia'라는 이름의 통합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나 언론들은 중국인들을 쁜다땅 pendatang 즉 '이민자들'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malaysiaoutlook.com



전통적으로 말레이 내 중국계는 광둥성이나 푸젠성 출신들 혹은 '하카'라 불리는 남방계들입니다만, 1990년대에 중국 본토 출신들과의 결혼이 많아지면서 중국계 커뮤니티의 구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늘 오래도록 남지요. 기나긴 분쟁을 거치는 사이에 말레이시아에서 공산주의 반군은 곧 중국계로 인식이 됐고, 중국계와 말레이계의 '민족 감정'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또한 이 분쟁은 인권 측면에서도 엄청난 상처를 만들었습니다. 


친펑은 태국으로 도망쳤다가 2013년 88세로 방콕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평화협정 뒤에도 말레이 정부는 친펑의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AP통신 기사를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있네요. "그는 베트남의 호치민,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미얀마의 아웅산,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와 함께 아시아 반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친펑은 그들과 달리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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