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계]악마들의 역사

딸기21 2017. 1. 2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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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미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대화를 나누는 딕 체니(왼쪽)와 도널드 럼즈펠드(오른쪽). Getty Images



미국의 조지 W 부시는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고 그 중 한 나라인 이라크를 2003년 공격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는 핑계를 댔지만 거짓말이었다. 전쟁은 중동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을뿐 아니라 테러의 물결이 세계를 휩쓸었다. 정작 부시는 ‘악의 축’ 발언을 후회했다고, 백악관 연설문 담당자가 고백한 적 있다. 그 아버지 조지 H W 부시 전대통령은 2015년 자서전에서 아들을 ‘잘못 보좌한’ 딕 체니와 도널드 럼즈펠드를 비난했다. 아들 부시 행정부에서 부통령과 국방장관을 맡았던 체니와 럼즈펠드가 아둔한 대통령을 앞세워 대테러전을 벌인 건 세계가 안다.

 

부시 부자는 지난해 미국 대선 때 도널드 트럼프를 편들지 않았지만 체니와 럼즈펠드는 앞장서 지지했다. 체니의 이름이 트럼프 시대에 다시 거론되는 것을 보니, 기실 미국 정치를 움직여온 것은 존 F 케네디나 로널드 레이건이나 버락 오바마가 아니라 바로 체니 같은 자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밝고 화려하고 발전된 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공작과 거짓정보와 위협의 음울한 역사를 뒤에서 만들어낸 자들.

 

아버지 부시는 회고록에서 이들을 탓했지만 따지고 보면 아버지 부시와 체니, 럼즈펠드는 모두 동시대의 산물이었다. 럼즈펠드는 제럴드 포드 정부 때 국방장관을 했고 레이건 정부 때에는 사담 후세인에게 군사정보를 줘 이란을 공격하게 했다. 아들 부시 시절 그가 다시 국방장관이 된 뒤 군 정보기구들과 중앙정보국(CIA)은 '테러용의자' 딱지만 붙이면 누구든 불법 납치해 세계의 비밀 시설에서 심문하고, 미국 땅에서 물고문을 할 수 있었다. 체니는 아버지 부시 때 국방장관을 지내며 걸프전을 치렀고, 그 후 미국기업연구소(AEI)같은 우파 싱크탱크에서 일하다 에너지회사 핼리버튼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통령 시절 핼리버튼에 이라크전 용역일을 몰아줘, 공익과 개인 이익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들끓었다. 그에 비하면 오랫동안 해온 자기 사업 때문에 논란을 빚은 트럼프는 양반이다.

 

아버지 부시도 남탓할 처지는 못된다. 공화당전국위원회를 이끌면서 워터게이트 스캔들 때 닉슨을 철벽처럼 지지했던 게 그였다. 심지어 케네디 암살 뒷공작에 개입했다는 루머도 끊이지 않는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CIA 국장을 지냈고,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연루됐다는 의혹도 남아 있다. 하지만 기록에 주로 남는 것은 여러 정권에 걸친 이들의 화려한 공직경력이며 어두운 과거는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는 한 소문으로만 남을 뿐이다.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는 스페인의 옛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측근이었다. 내전 때 군 장성으로 프랑코의 수족 노릇을 했고, 프랑코가 늙고 병들자 총리를 맡았다. 문화 공작과 선동도 맡아 했다. 1951년에는 식민통치를 스페인 애국주의로 포장한 ‘아메리카의 여명’이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직접 각본을 썼다. 권위주의 체제를 지탱한 검열과 반체제 인사 탄압, ‘프랑코 캠프’로 불린 강제수용소의 인권침해 등등 그와 결부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총리가 되고 반년만에 1973년 바스크 독립운동조직 에타(ETA)에 암살됐다. 에타가 그를 살해한 이유는 이랬다. “그는 프랑코 체제의 사령탑이었다. ‘프랑코주의’의 상징이었으며, 정치화된 가톨릭 종교조직 오푸스 데이에 권력을 줬고, ‘국가 안의 국가’를 구축했다. 그의 경찰조직은 프랑코의 도구였다.”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게는 하이메 구스만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법률가였고 상원의원이었던 구스만은 냉전 시절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를 곁에서 도왔다. 도운 정도가 아니라, 독재정권의 교리를 만들고 헌법을 다시 쓴 인물이 그였다. 쿠데타를 ‘혁명’으로 포장한 1978년 피노체트의 ‘차카리야스 연설’ 문안을 구스만이 썼다. 법학 교수 출신인 그는 1980년에는 악명 높은 피노체트 정권의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그의 구상에 바탕을 두고 피노체트는 철권을 휘둘렀고, 수많은 이들이 반체제 좌파로 몰려 고문과 살해를 당했다. ‘시카고 보이스’로 불리던 미국 신자유주의자들 입김대로 경제정책을 편 것도 구스만이었다. 정작 그에게는 이렇다할 공식 직함이 없었다. 그는 1991년 민주화 과정에서 게릴라들의 공격으로 숨졌다. 피노체트는 끝내 처벌받지 않은 채 죽었고, 칠레의 과거사 진상규명은 아직도 완료되지 않았다.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옆에는 자카리아 아즈미가 있었다. 의원 시절 집권당의 나팔수로 독재 체제를 뒷받침했고, 1989년부터 22년간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축재를 했다. 무바라크 아들 가말의 권력 세습 작업에도 관여했으나 2011년 무바라크가 쫓겨나면서 공염불이 됐다. 아즈미는 ‘아랍의 봄’ 뒤 투옥됐으나 2년만에 풀려났다.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낸 혁명을 지켜내지 못한 까닭이다.

 

구속된 김기춘은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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