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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차별 없는 복지국가 ‘정약용의 꿈’은 언제쯤 이뤄질까

딸기21 2016. 5. 2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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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과 찾은 ‘다산유적지’

“마음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진 뒤라야만 바야흐로 참다운 독서를 한 군자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이 된 뒤 더러 안개 낀 아침, 달 뜨는 저녁, 짙은 녹음, 가랑비 내리는 날을 보고 문득 마음에 자극이 와서 한가롭게 생각이 떠올라 그냥 운율이 나오고 저절로 시가 되어질 때 천지자연의 음향이 제 소리를 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시인이 제 역할을 해내는 경지일 것이다.”

정약용이 두 아들과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책 읽는 법, 술 마시는 법도, 사람 사귀고 벼슬을 살 때의 자세, 생계를 꾸릴 때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한 세세한 조언들이 담겨 있다. 멀리 떠나 있는 아버지의 훈계처럼 보이는 글들 속에 실학사상의 대가다운 면모들이 드러난다. 임금에게도 쓴소리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선비의 기개를 논하다가도,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감추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 18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500권 넘는 저서를 담은 조선 시대의 대학자. 한반도의 ‘르네상스인’이 있었다면 다산이었을 것이다.

지난 14일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오른쪽 세번째)과 함께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 정약용 생가 앞을 걷고 있다.



석가탄신일이기도 했던 지난 14일, 토요일의 하늘은 유독 높았고 햇살은 따가웠다. 양수리에서 팔당댐 쪽으로 3㎞ 거리에 있는 마재(마현부락)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산소가 있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비롯해 다산의 글들을 편역하고 다산의 일생을 좇아온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과 함께 다산유적지를 찾았다.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를 지나니 수풀 사이로 먼저 강물이 보였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 볼록 튀어나온 반도처럼 강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언덕배기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고, 언덕 앞에는 옛 글을 고증해 새로 지은 다산의 생가가 있다. “1925년에 홍수가 나서 다산의 집이 다 침수됐고 묘소만 남았어. 다산의 저서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후손들이 새끼줄에 몸을 묶어 강물에서 건져냈습니다. 마을은 다 없어졌지요.” 가파른 계단을 올라 다산 묘소에서 강을 내려다보며 박 이사장은 먼저 이 다산유적지가 어떻게 조성됐는지부터 말을 꺼냈다. 집 뒷산에 묘소를 쓰라고 했던 다산의 글을 바탕으로 집을 복원했으나, 정작 그 후손들은 이곳에 땅 한 뙈기 없다고 했다. 한국전쟁 등 현대사의 곡절을 거치며 집안 땅을 다 잃은 탓이다. 이곳 유적지 일대는 모두 남양주시 소유다.


“그래도 다산이 장가를 잘 갔어요. 부인이 서울의 잘 나가는 씨족이던 풍산 홍씨였습니다. 왕비를 여럿 낸 집안이지요. 다산의 외가는 윤선도 집안이었고. 장인이 이 부근에 땅을 사준 덕에, 유배를 당하긴 했으나 평생 글 쓸 여유가 있었어요.” 박 이사장의 설명에 34명의 동행객들 사이에서는 수시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공휴일에 놀러가지 않고 다산 유적지를 돌아보고 다산의 삶을 생각해보겠다고 이렇게 오신 여러분은 특별한 분들입니다.”


다산 생가 앞 실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자, 박 이사장의 본격적인 강의가 펼쳐졌다. “지금은 치과에만 가도 업무가 전문화, 세분화돼 있어요. 그걸 요즘은 프로페셔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산은 여러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학문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지리학, 의학, 역사학, 공학, 수리학, 음악…. 다산은 고대에 사라진 악경(樂經)을 포함시켜서 꼭 ‘사서육경’이라 불렀어요.”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 묘소를 찾은 동행객들이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왼쪽 두번째)으로부터 다산 정약용의 삶에 대해 듣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지금, 다산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대학자라는 것만으로는 다산을 설명할 수 없다. “다산은 500권의 책을 통해 민권 보장, 세금을 비롯한 착취로부터의 해방, 토지의 고른 분배와 소유, 빈부격차와 불평등 해소, 부자에게서 돈을 떼어 빈자를 돕는 손부익빈, 그런 사회, 그런 나라를 꿈꿨습니다. 부자감세에 빈부격차가 커진 시기에 우리는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다산의 꿈을 찾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박 이사장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논문 표절에 위장 전입, 탈세와 땅투기를 해야 고관대작이 되는 사회가 싫기에 다산을 읽는 겁니다. 백성이 주인이고 관리는 공복인 세상을 꿈꾼 다산을 읽으면 피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느새 이야기는 세월호와 어버이연합으로까지 흘러갔다. “자유당 때 경무대에서 경찰과 짜고 딱벌떼라는 것을 부렸어요.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용팔이가 있었고, 이제는 어버이연합입니다. 세월호 유족에 대한 반대집회라니, 기가 안 찹니까. 그러니 다산의 책을 읽으면 열불이 나고, 그것이 지금 다산을 찾아 여기 온 이유예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산 사상의 핵심은 애민(愛民)이라고 했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든 보람있게 살도록 하는 것. “노인, 어린이, 병든 사람과 재난을 당한 사람, 이런 약자들을 돌보라는 것이 애민사상입니다. 다산이 꿈꾼 복지국가는 200년이 지나도록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실학박물관 강의실에서 귀를 기울이던 동행객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산의 생각을 구현하려 한 인물이 정조였다. 다음 행선지인 수원 화성은 다산의 구상이 정조의 실행력과 만나 구현된 곳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김준혁 교수는 정조시대를 전공한 역사학자이자, ‘화성 박사’라 불리는 권위자다. 화성에서는 전문가인 김 교수가 안내자로 나섰다. 성 앞 화성박물관에서는 마침 ‘이방인이 본 옛 수원화성’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러일전쟁 뒤 한국에 온 독일인 장교 헤르만 산더가 남긴 1907년의 화성, 한국전쟁 뒤 오산비행장에서 근무한 미군들이 찍은 전후의 화성 사진들은 역사의 굴곡들을 보여준다. 판잣집과 논밭에 둘러싸여 있던 화성은 1970년대 이후 차근차근 복원돼 지금의 모습이 됐다.

수원 화성의 성곽길 아래쪽으로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했다는 연무대가 보인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김 교수가 가장 많이 강조한 것은 정조의 위민(爲民)이었다. 성의 윤곽을 결정하다 보니, 마을을 여러 차례 옮겨야 하는 상황이 됐단다. “정조는 ‘성을 짓는다고 이재민이 된 이들을 다시 이주시키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냐’고 했어요. 그래서 성곽의 위치를 민가 밖으로 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이 나뭇잎 모양이 됐지요.” 백성을 위하는 정조의 위민 정신이 담겨 있기에 화성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화성의 동쪽 큰 문인 창룡문(蒼龍門) 돌벽에는 축조 당시 건설기술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조는 땅 없는 농민도 생산할 수 있게 하고 기술 가진 이들이 대접받는 시스템을 바랐다. 화성은 정조가 생각한 개혁을 실험하는 혁신도시로 지어졌다. 기술자들의 이름을 새기는 ‘공사 실명제’도 그런 개혁 중의 하나였다.

“그 시절에는 겨울에 정3품 당상관 이상이나 쓰던 털모자를 기술자들에게도 나눠줬습니다. 기술자들을 불러서 대연회를 열기도 했고요.” 화서문 바깥에는 성문을 보호하는 반원형의 옹성(甕城)이 있다. 임진왜란 때 백병전에 능한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조선의 성문들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유성룡이 <징비록>을 통해 옹성 아이디어를 냈고, 다산은 이를 받아들여 화성을 설계했다. 김 교수의 열성적인 설명을 듣자니 돌벽 어느 하나도 쉽게 보아넘길 수가 없었다.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는 노대와 포대들을 지나 성곽을 따라 걸었다. 멀리 아파트단지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시공이 겹쳐진 듯한 풍광이 이어졌다. 일행이 걸음을 멈춘 곳은 동장대(東將臺)다. 장대는 화성에 머물던 군사들을 지휘하던 곳이다. 정조 19년인 1795년 지어졌다. 무예를 수련하던 곳이라 해서 연무대(鍊武臺)라고도 한다. 사방이 탁 트인 동장대 앞에는 하마석(下馬石)이 있다. 정조가 말을 타고 내릴 때에 쓴 디딤돌이다.

“당시에는 노비를 땅에 엎드리게 하고 등을 밟아 말에 오르곤 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나는 평생 미천한 마부에게라도 이놈 저놈 해본 적이 없다’고 한 분이었어요. 노비를 없애려 했지요. 이 세상에 노비보다 슬픈 존재는 없다 했고, 노비제를 혁파하기 위해 노론·소론 합의를 이끌어냈는데 시행하기 반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정조의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이라는 가정은 그저 부질없는 것일 뿐일까. 이번 동행에 참가한 대학원생 손성배씨(28)는 수원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 때 들은 적 있지만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듣게 되니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다산 사상을 지금 되새겨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입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을 지나 내려가니 화홍문(華虹門)이다. 홍수에 떠내려간 누각을 1933년 수원 시민들이 모금해 복원했다고 한다. 시민의 손으로 문화재를 복원하고 지킨 국내 첫 사례일 것이라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도심과 만나는 장안문(長安門)의 현판은 김종필 전 총리의 글씨다. 누가 썼는지를 놓고 추측이 무성했는데, 최근 김 전 총리가 회고록에서 자신이 썼다고 밝혔다. 다산과 정조의 길을 걷다가 만난 독재정권의 유물은 아이러니했다. 화성의 햇살과 바람을 뒤로 하고 안산의 성호 이익 묘소와 성호기념관에 들르는 것으로 이날의 여정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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