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음… 결정했습니다.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모든 시민이… 국경의 어디를 통해서든 떠날 수 있게 허용하기로.”
1989년 11월 9일 저녁, 동독 공산당의 공보담당 정치국원 귄터 샤보프스키는 기자회견을 열고 그날 결정된 여행법 개정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여행 자유화 조치가 실시되느냐는 질문에 그는 더듬거리며 답했다. “내가 알기로는, 음, 지금…, 지금 당장입니다.”
1971년부터 철권통치를 해온 에리히 호네커 정권은 이미 밑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고, 라이프치히에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다. 동·서독 간 이동을 허용하라는 요구도 거세지고 있었다. 하지만 38년 동안 두 지역, 아니 ‘두 세계’를 갈라온 장벽이 일순에 무너질 줄은 아무도 예상 못했다.
옛 동독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귄터 샤보프스키가 1989년 11월 9일 기자회견에서 동·서독 간 여행 자유화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EPA자료사진
그날 밤을 역사적인 순간으로 만든 것은 샤보프스키의 기자회견이었다. 동독 정권은 이튿날 새벽 4시 장벽을 열고 상황을 통제할 계획이었으나 샤보프스키가 ‘실수로’ 발표를 해버린 것이었다. 당초 그가 쥐고 있던 회견문에는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비자를 받아서’라는 문구가 들어있었으나, 그 말은 낭독되지 않았다.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를 하던 서독을 비롯한 각국 언론들은 일제히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보도했다. 동독 사람들은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병사들은 총을 내려놨고, 밤새 사람들은 장벽을 넘었다. 검문소 문은 활짝 열렸다. 곳곳에서 시민들이 샴페인을 터뜨렸다. 통일의 시작이었다.
샤보프스키는 1929년 독일 북동부 안클람에서 태어났다. 노동조합 회보 만드는 일을 하다가 공산당 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새로운 독일)’로 옮겨갔고, 1978년에는 기관지 편집장이 됐다. 1984년 정치국원으로 승진하는 등 출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 부근에서 그가 보낸 마지막 몇 년은 동독은 물론 동유럽 전체의 공산정권들이 관료제와 부패 때문에 껍데기만 남은 채 무너져간 시기이기도 했다.
Crowds cheer on night of the Wall's opening /dpa
샤보프스키는 독일 통일의 ‘우연한 영웅’이 됐다. 사태가 갑자기 진전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가는 것을 가리키는 ‘샤보프스키 모멘트’라는 표현도 생겼다. 정작 그 자신은 기자회견이 불러올 폭풍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1990년 그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시민들의 대탈출과 장벽의 붕괴를 당장에 불러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면서 “하지만 동독 공산정권은 더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고, 내가 벌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샤보프스키는 회견 이듬해 동독 공산당에서 축출됐으며 통일 뒤인 1997년에는 서독으로 탈출하는 시민들을 사살하도록 명령한 죄로 기소돼 복역하기도 했다. 독일 도이체벨레, DPA통신 등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가 1일 베를린의 요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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