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검은 스파르타쿠스'가 세운 나라, 아이티

딸기21 2015. 10. 29. 10:52
오늘날까지도 아이티 학생이라면 누구나 루베르튀르가 프랑스로 끌려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을 암송한다. “내가 무너진다면 생도맹그의 단 하나뿐인 자유의 나무는 쓰러지고 말리라. 그래도 자유의 나무는 다시 살아나 땅 속 깊이 수많은 새로운 뿌리들을 내리리니.”

-노암 촘스키,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이후)





중미 카리브 해의 섬나라 아이티(Haiti). 히스파니올라(Hispaniol)라는 섬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동쪽은 도미니카공화국이죠. 히스파니올라라는 이름은 ‘작은 스페인’을 뜻합니다. 1492년 이 섬에 도착한 크리스토퍼 콜럼부스가 붙인 이름입니다.

스페인은 그 4년 뒤인 1496년 이 섬의 산토도밍고(Santo Doming)에 식민 정착지를 만들었습니다. 스페인 최초의 ‘서반구 정착지’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1697년 이 섬의 서쪽 절반, 오늘날의 아이티를 프랑스에 내주게 됩니다. 그 때부터 프랑스와 아이티의 처절한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아이티는 지구상 어떤 나라와도 닮지 않은 나라”라는 구절을 어디에선가 읽은 적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라틴아메리카에 속해 있지만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아닌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이지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을 주도한 것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의 후손이었습니다만, 이 나라는 ‘해방 노예’가 주축이 돼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이웃나라들과 차이를 보입니다.

주민 대다수가 아프리카계(1000만 명이 조금 넘는 인구 중 95%가 아프리카계입니다)라는 것도 중남미의 다른 나라들과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아프리카 국가들과 딱히 역사적, 문화적으로 연결돼 있지도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 구절은 이 나라가 세상 어떤 나라와도 다른 ‘외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 같습니다.

노예에서 해방투사로 


아이티는 흑인 노예출신 혁명가들의 투쟁으로 1804년 프랑스 지배에서 독립했습니다. 건국의 아버지인 프랑수아-도미니크 투생 루베르튀르(Francois-Dominique Toussaint L‘ouverture)는 ‘검은 스파르타쿠스’라 불렸던 사람입니다. 촘스키의 책에서 인용한 생도맹그(Saint Domingue)는 지금은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가 된 히스파니올라 섬의 중심 도시, 산토도밍고의 프랑스식 이름입니다. 루베르튀르는 그렇게 싸워, 피로써 아이티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루베르튀르는 1743년 생도맹그 근처에 있는 프랑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농장에서 말을 몰고 훈련시키는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의 주인은 루베르튀르가 33세였을 때 노예 신분에서 풀어줬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루베르튀르는 자유로운 신분이 된 뒤 생도맹그의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투생 루베르튀르


1790년 자크 뱅상 오제(Jacques Vincent Ogé)라는 인물의 주도로 반 프랑스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루베르튀르는 해방노예 신분으로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여러 집단으로 구성된 노예들의 봉기를 이끌었습니다. 2년 뒤 프랑스 식민의회는 흑인과 뮬라토(히스패닉계와 아프리카계 사이의 혼혈)를 노예의 족쇄에서 풀어주고 완전한 시민권을 보장해주는 법안을 채택했습니다.

당시 아이티에서는 프랑스 본국 정부의 간섭에 반발하는 백인 농장주들과 백인 노동자들, 노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의 흑인들, 흑인 노예보다는 우월한 지위에 있지만 백인에 비해서는 차별받는 뮬라토들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들 권리를 키우기 위한 저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러 세력은 제각기 프랑스 의회에 찾아가 자기네들 편에 유리하게끔 입법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1791년 산토도밍고 흑인 노예 폭동을 그린 그림


당초 프랑스 정부는 히스파니올라 섬 백인 이주민들의 반발을 내리 누르고 노예해방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1792년 루이16세가 처형되고 프랑스는 소요와 전쟁에 휘말리게 됐으며, 머나먼 섬의 일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루베르튀르는 남부와 북부의 주민들을 규합,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프랑스가 약해진 틈을 타 영국군이 쳐들어오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 


1794년 루베르튀르는 4000명의 아프리카계 해방노예로 게릴라 부대를 결성했습니다. 영국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그 해 2월 프랑스 본국 정부로부터 노예제를 영구적으로 없애겠다는 확답을 받았지만, 그 다음에는 스페인 침략자들에 맞서 다시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열강들이 모두 나서서 플랜테이션으로 부(富)를 일구던 작은 섬을 뜯어먹기 위해 피 튀기는 경쟁을 하던 시대였던 겁니다.


‘서반구 최초의 흑인 혁명가’


정식 군사훈련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루베르튀르는 타고난 지도자이자 군사 전략가였습니다. 그는 장-자크 드살린(Jean-Jacques Dessaline)과 앙리 크리스토프(Henri Christophe)라는 뛰어난 두 부관을 데리고 유럽 열강의 군대들과 잇달아 싸워 이겼습니다(루베르튀르와 마찬가지로 해방노예였던 앙리 크리스토프라는 인물은 19세기 초반에 아이티의 대통령을 지내기도 했으나, 뒤에 스스로 ‘왕국 건국’을 선언하고 국왕을 자처한 논란 많은 인물이지요). 


루베르튀르의 투쟁 소식에 영향을 입은 파리의 자코뱅(Jacobins) 혁명정부는 프랑스의 모든 영토에서 노예제를 폐지했습니다. 아이티 혁명은 비록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고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루베르튀르는 노예해방 뒤에 오히려 더 큰 고난에 부딪칩니다. 하지만 지략을 발휘, 프랑스와 손을 잡고 여전히 노예제를 포기하지 않고 있던 스페인과 영국 침략군에 맞섭니다. 그는 스스로를 ‘공화주의자’로 선언하고 생도맹그 프랑스인 주지사 휘하의 장군이 되어 영국군을 몰아냈습니다. 뒤이어 프랑스 세력을 쫓아냈고, 1801년에는 스페인군도 축출했습니다. 그 해 7월 루베르튀르는 히스파니올라 섬의 통일을 선언하고 자치정부의 수반에 취임했습니다.


1802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반동 정부는 쟈코뱅 정부의 약속을 뒤집어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매제인 샤를 레클레르크(Charles Victoire Emmanuel Leclerc)를 시켜 해군 선단을 이끌고 히스파니올라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루베르튀르는 노예제를 다시 도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레클레르크와 강화조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레클레르크는 또 다시 약속을 깨고 루베르튀르를 체포, 프랑스로 데려가 동부의 두 Doubs 지역에 있는 포르데주(Fort-de-Joux) 교도소에 잡아넣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옛 동지이면서 훗날 권력 다툼을 벌였던 데살린이 루베르튀르의 몰락에 힘을 보탰지요. 프랑스로 압송돼 가면서 그는 “생도맹그의 자유의 나무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루베르튀르가 오히려 권력을 잡은 뒤에 ‘농장주들’ 이익을 옹호하고, 명목상 자유민이지만 실제로는 노예 노동을 해야 하는 흑인 농민들을 억압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아이티가 경제적으로도 독립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1805~1820년 프랑스의 공격에 맞서 독립을 지키기 위해 아이티 북부 산지에 세워진 라페리에르 시타델(Citadelle Laferrière). 앙리 크리스토프 시타델이라고도 불립니다. 시타델은 성채를 뜻합니다. _ Rémi Kaupp at wikipedia.org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서반구 최초의 흑인 혁명가’ 루베르튀르는 옥중에서 폐렴에 걸려 1803년 4월 7일 숨을 거뒀습니다. 그러나 그가 씨앗을 뿌린 히스파니올라 흑인들의 해방과 독립의 꿈은 결실을 거뒀습니다. 이듬해 1월 1일 생도맹그의 해방노예들은 아이티라는 나라의 건국을 선언했습니다. 10만 명의 흑인 노예들과 2만4000명의 백인 이주자들이 목숨을 잃은 뒤 쟁취해낸 독립이었습니다. 


그 후 루베르튀르에게서 영감을 받은 수많은 유색인 혁명가들이 중남미 곳곳에서 식민제국과의 싸움을 벌였습니다. 역설적이지만 프랑스의 영웅들을 기리는 파리의 판테옹(Pantheon)에는 루베르튀르를 기리는 부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미국과 아이티, 두 ‘독립국’의 어긋난 관계


아이티는 흑인 노예출신 혁명가들의 투쟁으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미국과 아이티는 ‘서반구에서 가장 오래된 두 독립공화국’이 되었는데요. 하지만 아이티가 독립 전쟁을 벌일 당시 미국은 자국 내 흑인노예들이 자극받을까 우려, 독립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고 합니다. 두 나라가 걸어온 역사적 경로가 얼마나 달랐던가를 그대로 보여주지요. 영국과 싸워 미국을 세운 사람들은 백인 엘리트층이었고, 프랑스와 싸워 아이티를 세운 사람들은 흑인 해방노예들이었습니다.

1919년 경 아이티를 점령한 미 해병대원들이 현지인 안내원을 앞세워 산악지대의 반군들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_ 미국 국립문서보관소(www.archives.gov)


힘들게 독립한 아이티의 역사는 순탄치 못했습니다. 나라를 세운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1806년 데살린이 암살을 당했고, 아이티는 흑인들이 우세한 북부 지역과 뮬라토가 지배하는 남부로 나뉘어 내전을 벌입니다. 1818년 피에르 부아예(Pierre Boyer)가 나라를 통일하지만 그는 흑인들을 권력에서 배제했습니다. 


20세기로 넘어와서 아이티의 역사는 더더욱 꼬입니다. 이때부터 아이티의 역사에 심각한 상흔을 입힌 나라는 미국입니다.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은 세계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아이티와 얽히고설킨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은 1915년 아이티를 침공한 뒤 점령했고, 1934년에야 물러났습니다. 


그 이후 이 섬나라는 세습 독재정권에 휘둘립니다. 1956년 파파독(Papa Doc,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버지 박사’라는 뜻입니다)이라 불리는 프랑수아 뒤발리에(Francois Duvalier)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1964년 뒤발리에는 스스로 종신 대통령이 됐다고 선언하지요. 그러다가 5년 만에 죽었고, 겨우 19살이었던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Jean-Claude Duvalier)가 종신 대통령직을 물려받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장-클로드는 베베독 (Bébé Doc, 아기 박사)이라 불렸지요.


'파파독’ 프랑수아 뒤발리에(왼쪽)와 ‘베베독’ 장-클로드 뒤발리에.


뒤발리에 세습 독재정권을 지원한 것이 미국입니다. 쿠바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73년 이래로 미국은 아이티의 최대 원조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베독이 1986년 결국 쫓겨나고 아이티 민주화 운동이 세계에 부각되자 미국은 이 나라를 중미의 ‘민주주의 모범생’으로 만들어 선전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꿨습니다. 


미국은 1995년 이래로 2010년 아이티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 나라에 15억 달러(약1조7000억원) 가량을 줬습니다. 국제사회의 아이티 지원을 조직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미주기구(OAS)를 통한 지원은 물론이고, 캐나다·프랑스·베네수엘라·칠레·아르헨티나와 함께 유엔 산하에 ‘아이티의 벗들’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도왔습니다. 2001년부터는 이 그룹에 카리브공동체(CARICOM·카리콤)와 유럽국들도 끌어들였습니다. 물론 미국이 아이티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데에는 난민 문제도 걸려 있었습니다. 


1991~94년 아이티에 군사쿠데타 정권이 들어서자 난민 6만7000명이 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바하마 등 주변국들도 모두 난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미국은 민주화된 아이티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게 싫어서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1990년 아이티에서는 해방신학자 출신인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가 대통령이 됐습니다. 아이티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자유롭고 평화로운 선거를 통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곧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라울 세드라스(Raoul Cedras) 장군이 권력을 움켜쥡니다. 


‘좌파’ 아리스티드를 미워했지만 군사쿠데타를 대놓고 밀어줄 수 없었던 미국은 아이티에 경제 제재를 가했습니다. 군사정권은 미국의 압박에 밀려 1994년 물러났고, 쫓겨났던 아리스티드가 귀국했습니다. 어수선했던 시기에 내전을 막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미군은 나가고 유엔 평화유지군이 질서유지 책임을 떠맡았습니다. 1995년 12월 아리스티드의 동지 중 하나였던 르네 프레발(Rene Preval)이 대통령이 됐습니다.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www.aristidefoundationfordemocracy.org


정정 불안은 가시지 않았고, 2000년 11월 아리스티드는 다시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곳곳에서 아리스티드에 반대하는 군부 잔당들이 쿠데타를 시도하고 폭력 사태를 일으킵니다. 독립 200주년을 맞은 2004년, 기념 잔치는 다시 정정 불안과 봉기로 얼룩졌고 아리스티드는 재차 망명길에 오릅니다. 아리스티드를 원치 않는 미국이 뒤에서 조종, 그를 몰아내고 프레발을 내세웠다는 의혹이 퍼졌지요. 그후 아리스티드는 유럽을 돌면서 “미국이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켜 나를 내쫓았다, 나는 미국에 의해 납치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이티, 역사의 역설


2010 1월 12일 아이티는 정정불안이 계속되는 와중에 규모 7.0의 강진을 맞았습니다.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23만 명 이상이 숨졌고(사망자가 31만 명에 이른다는 추정치도 있습니다) 230만 명이 이재민이 됐습니다. 아이티의 병원 절반이 무너졌으며 정부 건물의 60%가 파괴됐습니다. 무너진 집은 25만 채에 이른 것으로 추산됐습니다. 경제적 손해는 차치하고, 무너지고 부서져 손상된 것만 따져도 80억 달러(8조9000억원)가 넘을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그래서 유엔이 대대적으로 모금 캠페인을 했죠. 인프라 복구와 치안유지·재건 지원에 가장 먼저 팔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항공모함까지 동원해 병력을 파견했지요. 그래서 우고 차베스 당시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등 남미 ‘반미 좌파지도자’들이 미국을 향해 “군사 점령을 시도하느냐”며 맹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우스운 것은, 그때 미국이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Port Au Prince)에 있는 투생 루베르튀르 국제공항의 관제탑을 비롯한 주요 시설을 통제하기 시작하자 프랑스가 볼멘소리를 냈다는 겁니다. 당시 프랑스 관료가 민항기를 타고 루베르튀르 공항에 갔다가 미군에 입국을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프랑스는 “미국의 역할은 아이티를 돕는 것이지, 아이티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맹비난했습니다. 


누가 누구를 욕할 처지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부실한 아이티 정부를 대신해 사실상 국가를 운영하다시피 해온 유엔마저 지진에 강타당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아이티의 치안을 유지할만한 물리력을 가진 것은 미국뿐이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논란의 와중에 ‘아이티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미군 통제로 논란이 된 루베르튀르 공항은 프랑스에 맞선 루베르튀르의 이름을 딴 곳입니다. 그가 피로 세운 아이티에서, 200여년 뒤에 미국과 프랑스가 다시 점령이다 아니다 말싸움을 했던 꼴이죠. 


어찌 됐든 국제사회는 지원과 관심을 보냈습니다. 지진 뒤 3년 동안 아이티를 위해 모금된 돈이 90억 달러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지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해 외부 기금들이 재건을 맡았습니다. 결과는 역시나 역설적입니다. 아이티는 재난 뒤 ‘NGO(비정부기구) 공화국’으로 전락했습니다. 돈을 모아가지고 들어가서 재건을 맡은 게 비정부기구들이었으니까요. 도우러 들어간 유엔 평화유지군은 오히려 콜레라를 옮겼습니다. 지진 이듬해 큰비가 오는 바람에 아이티의 또 다른 별명은 ‘콜레라 공화국’이 됐습니다. 


200여 년 전 중남미 식민지 중 가장 많은 부를 산출해내는 곳이었던 아이티는 지금은 가난의 상징이 돼버렸습니다. 면적 2만7750㎢에 인구 1000만 명의 이 나라는 여전히 10명 중 4명은 글을 못 읽을 정도로 교육 수준이 낮습니다. 도시 지역에서는 35%, 농촌에서는 52%의 주민이 제대로 된 수도 시설 없이 살아갑니다. 구매력 기준(PPP)으로 본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14년 현재 1800달러에 불과한 최빈국입니다. 가난과 건강문제를 파헤친 미국 의사 폴 파머는 아이티를 가리켜 “급성이자 만성인 재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이티 관광청 웹사이트(www.haititourisme.gouv.ht)에 올라와 있는 사진입니다. 아이티가 이 사진처럼 낙원으로 바뀔 날은 언제일까요.


아이티의 숱한 아이들이 남의 집 ‘더부살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노예가 되고 심지어 미국 등지로 팔려나갑니다. 루베르튀르의 꿈은 여전히 미완성입니다. 200여 년 전 루베르튀르가 노예해방 투쟁을 벌일 때보다, 오히려 지금, 21세기에 아이티에는 더 많은 노예들이 존재한다고 하니 역사는 참 잔인합니다. 


마지막으로 남미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이었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의 글 한 토막을 올려놓습니다. 이 글 또한 아이티의 ‘잔인한 역설’을 보여줍니다.


“시카고에는 흑인이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겨울에 뉴욕에서는 태양이 돌을 흐물거릴 때까지 녹인다. 브루클린에서는 서른이 되도록 살아 있으면 동상을 세워 기릴 만하다. 마이애미에서 가장 좋은 집들은 쓰레기로 지어졌다. 미키는 쥐들에 쫓겨 할리우드에서 달아난다. 시카고, 뉴욕, 브루클린, 마이애미 그리고 할리우드는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가장 처참한 변두리 빈민가인 시테솔레이(Cité Soleil)에 있는 몇몇 지구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