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스페인 지방정부들, ‘왕실과의 전쟁’

딸기21 2015. 7. 28.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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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와 추문에 시달리며 위신이 땅에 떨어진 스페인 왕실이 천적을 만난 것일까. 지난달 스페인 지방선거에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비롯해 주요 도시들을 석권한 좌파 지도자들이 ‘왕실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스페인 제2의 도시이자 경제 중심지인 바르셀로나의 아다 콜라우 시장은 지난 24일 시 청사 대회의실에 있는 후안 카를로스 전 국왕의 흉상을 치우라는 지시를 했다. 명분은 후안 카를로스가 더 이상 ‘국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안 카를로스는 지난해 6월 아들인 펠리페에게 양위를 했다.


Barcelona city council removes the bust of the former Spanish king Juan Carlos, who abdicated last year. Photograph: Miquel Llop/NurPhoto/Corbis

The bust is stuffed into a cardboard box. Photograph: Josep Lago/AFP/Getty


콜라우는 지난달 13일 치러진 시장 선거에서 좌파 연합 ‘바르셀로나 엔 코무’의 후보로 나와 당선돼 바르셀로나의 첫 여성 시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 때 주택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는 서민들을 위해 일한 시민운동가 출신이다. 그를 내세운 ‘바르셀로나 엔 코무’는 그리스의 집권 시리자와 쌍벽을 이루는 스페인 좌파단체 포데모스가 포함돼 있는 좌파 연합정파다. 콜라우와 포데모스는 금융위기 시절 유럽 채권단의 위압에 맞서 ‘점령하라’ 시위를 주도했다.



왕실 상징을 지우고 있는 것은 바르셀로나 뿐이 아니다. 북동부의 유서깊은 도시 사라고사에서도 포데모스가 이끄는 새 시 정부가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사라고사는 ‘프린시페 펠리페(펠리페 왕세자)’라 불리던 시 체육관의 이름을 최근 사망한 지역 유명 농구감독 이름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이 조치는 보수 인민당의 강한 반발로 결국 27일 무산됐으나, 지역 내 여러 정당들의 지지를 받았다. 


시민운동가에서 바르셀로나 최초의 여성 시장이 된 아다 콜라우. 사진 WIKIPEDIA


역시 포데모스가 집권한 남부 도시 카디스에서는 새 시장이 집무실에 있던 후안 카를로스의 사진을 떼어내고 지역에서 유명한 아나키스트의 사진으로 바꿔 달았다. 바르셀로나 근교의 몬카다이레이삭은 펠리페4세 현 국왕의 초상화까지 시청 회의실에서 치워버렸다.

 

스페인에서는 1975년 11월 독재자 프랑코가 숨진 뒤 입헌군주제가 부활했고 후안 카를로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스페인 민주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는 평가와,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권에 부역했다는 비난을 동시에 들었다. 



왕실의 인기가 급락한 것은 금융위기 이후다. 경제가 휘청일 때에 사치를 일삼아 도마에 올랐으며, 특히 2012년에는 후안 카를로스가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코끼리 사냥을 해 거센 반발을 샀다. 지난해에는 후안 카를로스의 막내딸인 크리스티나 공주가 공금 유용 혐의로 기소됐다. 결국 ‘양위’라는 극약처방을 통해 민심을 얻어보려 했으나 아직은 별 성과가 없어 보인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2013년 6월 25일 소피아 왕비와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일어난 열차사고 피해자들이 입원한 병원을 방문하고 있다. /AP


AFP통신은 28일 스페인 왕실에 대해 글을 써온 작가 아벨 에르난데스를 인용해, 왕실의 상징을 없애려는 ‘좌파 도시들’의 움직임을 ‘역사의 복수’라 보도했다. 스페인 좌파는 프랑코 정권에 맞선 싸움을 주도했으나 정작 ‘민주화 과정’에서는 배제됐다. 파시스트 정권에서 왕실로 권력의 ‘얼굴’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보는 좌파들은 지금 민주화 이후의 헌법인 ‘1978년 헌법 체제’에 도전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3월에는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에서 후안 카를로스가 방탕한 행위를 일삼는 모습을 묘사한 조각상이 전시돼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반면 좌파 지방정부들의 조치야말로 ‘역사를 무시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후안 카를로스의 전기작가인 세자르 드 라 라마는 관공서에서 전 국왕의 표상을 없애는 것에 대해 “역사적인 민감성에 대한 인식이 없이 왕정을 비웃는 행동”이라며 “후안 카를로스는 40년 동안 스페인의 안정과 민주주의에 기여해왔다”고 주장했다. AFP는 지방정부들의 움직임을 가리켜 “왕실 비판이라는 오랜 금기가 깨지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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