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박하사탕, 광주, 자위대

딸기21 2015. 5. 26.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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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5.18 무렵에 사카이 나오키의 <일본, 영상, 미국>을 읽게 됐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지만 책을 다시 펼치는 데에는 약간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시일 뒤처진 '광주 이야기' 혹은 '광주를 이해하기'가 된 것 같다. 하지만 꼭! 새겨들어야 할 분석이라는 점에서 옮겨둔다.

나는 영화 박하사탕」을 보지 않았다. 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철길에 선 어떤 남성의 얼굴, 절망한 표정만이 기억날 뿐이다. 일본 출신으로 미국에 사는 학자 사카이 나오키는 이 영화를 통해 광주를 곱씹고, 자신의 눈으로 광주를 바라본다. 

나로서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민주주의라는 언어의 유래를 구하는 작업에 커다란 의의를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나였기에 광주를 방문한다는 것은 오늘날 세계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념과 그 실천의 본거지 중 한 곳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민주주의가 하나의 국민·민족·인종·전통 혹은 문명의 전유물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서 끊임없이 확대해 가는 것인 이상, 민주주의의 기원은 그 궤적에 있을 터이고,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라서 진정으로 움직였던 사람들 안에 있을 터이다. 요컨대 나는 민주주의의 기원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1980518일 이래로 이미 17년의 세월이 경과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묘비 주위에는 수많은 생화 꽃다발이 시든 헌화와 뒤섞인 채 놓여 있었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참배하러 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광경에는 예기하지 못했던 생생함이 있었기에 나는 허를 찔렸다. 이 장면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지 못해 잠시 낭패감에 휩싸였던 기억이,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200)

 

그의 글(내전의 폭력과 국민주의, 박하사탕」을 해석한다)은 광주에 발을 딛게 됐을 때의 문제의식과 감상으로 시작한다. 광주민중항쟁, 혹은 광주학살 25년. 한국에서마저(!) 광주학살은 '북한군이 폭도로 가장해 유발한 것' 혹은 '북한군이 저지른 것'이라는 주장이 버젓이 등장하는 거짓선동의 시대에, 먼 곳 외국인의 광주 여행 소감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뒤이어 그는 박하사탕」을 통해 광주를 본다.


군인이 한 여학생을 죽인 사건이 그 정도로 이상한 사건으로 느껴지는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 거기에는 어떤 사람을 자포자기한 존재로 변하게 만들어 버리고 마침내는 자살로 몰아버릴 만큼 가슴 아픈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그 정통성을 획득하고 있는 한국군이 한국인 여학생을 죽인 것, 동포가 자신의 동포를 죽인 것, 더구나 오인 사격에 의한살인은 한국 국민이 같은 한국 국민을 죽였다는 내전적 전투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216)


영화 속 주인공은 한 소녀를 죽였고, 오랜 시간 버텨오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극악한 범죄이지만, 살인범들이 모두 목숨을 끊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전쟁 혹은 군사작전에 동원된 '군인'의 경우에야. 만일 군인이 명령을 받아 작전을 수행하는 도중 누군가를 죽였다는 이유로 죄책감에 시달리다 자살해버린다면 어떤 군대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 남성은 목숨을 끊었다. 그 죄책감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 죄책감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어떤 '죄책감의 공감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나오키가 가진 의문의 출발점이다. 언뜻 우리는 쉬운 대답을 떠올릴 수 있다. 그가 명령받았던 전쟁 혹은 작전이 옳은 것이 아니었다? 모든 전쟁, 모든 살인은 옳지 않다. 어떤 전쟁이나 작전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사회적 합의에 있다. 그 합의가 있다고 믿었기에 그는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그 합의는 거짓 합의였다.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우리 마음 속으로, 그 합의가 거짓이었음을 안다. 그 작전은 옳지 못한 작전이었다. 그것이 주인공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영화를 보는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이렇게만 말하면 너무 일반적이다. 나오키는 일반론을 넘어, '한국의 군대'가 갖는 지위와 그 배후에 숨은 식민지적 속성을 파헤친다. 그리고 거기에 '내전'이라는 고강도 진단을 들이민다.


근대 국민국가에 있어서 국가주권의 근거로 상정된 국민은 국민의 바깥에 있는 외국인과 국민 안에 있는 동포를 구별하는 원리이기도 했다. 국민군은 경찰력과 명확히 구별된다. 경찰력이 국내 치안유지와 법 집행을 위해서 국민 내의 무법자를 대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비해서, 국민군이 폭력을 행하는 대상은 국민공동체 바깥에서 오는 위협, 즉 외국인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던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과 같은 근대국가 이외의 영토에서, 국민군의 폭력과 경찰의 폭력을 이념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언제나 타당한 것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세계 대부분의 땅이 식민지였으므로, 이런 구별 자체는 제국주의 국가들만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었다.

한국전쟁·콩고동란·베트남전쟁·앙골라내전·동티모르전쟁·니카라과내전·이스라엘의 서안지구 점령·구 유고슬라비아 분쟁과 같은 많은 희생자를 냈던 전쟁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국민군과 경찰에 의한 폭력의 이념적 구별이 존중된 전쟁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적다. 그뿐만이 아니다. 1991년 걸프전쟁과 2003년 이라크침략에서의 군사적 개입을, 미국 정부는 국제적인 경찰력의 행사로 정당화했다. 군사력과 경찰력의 기본적인 차이가 소거된 이 새로운 사태는, 군사적 폭력의 대상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내전에서의 적으로 규정되었음을 명백히 드러낸다.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는 용어가 진정으로 시사하는 것은 이러한 일이다. (221)

미국에 의한 일본 점령은 이라크점령의 모델로 줄곧 인용되고 있다동아시아에서 미국이 헤게모니를 만들어 갈 때군사력과 경찰력의 기본적인 차이가 처음부터 휴지 상태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한국과 일본의 국민주의에서 볼 때, 군사력과 경찰력의 구별은 이미 1940년대 후반부터 쭉 무화과나무의 잎사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224쪽)

 

군대는 외적을 물리쳐야 하고, 경찰은 내부의 치안을 맡아야 한다. 그런데 '외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이 자국민이 아닌 식민주의 권력(미국)이라면. 안과 밖, 외적과 내부의 적은 하나가 된다. 경찰은 애시당초 내부의 적을 처치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 적이 사회 공공의 적이 아니라 역시나 식민주의 권력 혹은 거기 빌붙은 정치권력의 적을 말하는 거라면, 역시 '적'은 자국민이 되어버린다. 이런 군대, 이런 경찰이 치르는 전쟁은 '내전'이다.


여기서 다시금 물어보도록 하자. 박하사탕의 주인공 김영호를 이 역사 속에 놓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그의 죄책감과 자살에 대해서 관객인 우리가 갖는 죄책감은 내전에 관계한 자의 죄책감 일반을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224)


사카이 나오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일본의 군대 또한 '내전의 논리'를 따르게 만들어진 미국의 군대였다고. 거기에 한국-일본과 미국의 관계를 꿰뚫는 구조가 있고, 따라서 박하사탕」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1950년에 맥아더의 명령으로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가 만들어졌다. 경찰예비대는 한국전쟁을 위해 한반도에 그 병력을 나누어야 했던 일본 주둔 미군이 인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고안한 경찰-군대였던 것이다. 그 업무는 미 주둔군과 이를 지탱하는 하부구조를 잠재적인 반란이나 방해에서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 잠재적인 적은 미군 기지나 미군 병침설비를 습격하는 일본인 혹은 일본인 내 반미·반체제 세력이었던 것이다. (225)

 

1990년대가 되어, 이렇게 만들어진 자위대에게 유사법제로 통칭된 일련의 입법을 통해서 고전적인 국민군의 치장을 주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 2000년대가 되어 고이즈미 정권 하에서 그때까지 불문율이었던 미국에 의한 일본의 군사력관리가 명문화되었고, ’자위대의 식민지군으로서의 성격이 제도화되었다. 아베 정권 하에서 진행 중인 자위대를 국민군으로 승격시키려는 움직임은, 말하자면 일본 식민지화의 화룡점정인 셈이다. 전후 일본의 국민주의 논리가 미국의 군사지배를 정비하는 단계에서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제국을 상실한 후 일본의 국민주의는 미국의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헤게모니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227)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필리핀에서도, 나아가 1960년대에는 남베트남에서도, 미국은 가능한 한 현지인에 의해 조직된 군대에 그 경찰-군사폭력을 위임함으로써 원주민의 증오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이 정책적으로 파탄났을 때-가령 베트남전쟁 시기에 볼 수 있듯이 -미군은 원주민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일본군이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전투원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231)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복지를 지킨다는 국민군의 이념 그 자체가 공문화되고, 국민군의 지상명령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준칙은, 간접적인 식민지체제에 봉사하기 위해 병사를 감정적으로 동원해서 국민의 합의를 만들어 내려는 구실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처럼, 국민군은 용병군과 분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박하사탕의 주인공 김영호를 깊이 상처 입혔고, 그를 자살로까지 몰고 간 지각, 자신이 내전의 논리에 가담하고 있다는 이 자각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헤게모니와 공범해서 키워진 국민주의 전체에 들어맞는 것이 아닐까. 경찰력의 폭력과 군사력의 폭력을 구별할 수 없는 내전의 폭력 논리가 국민주의에 내재해 있는 건 아닐까. (233)

 

이렇게 해서, 그는 광주를 통해 자위대를 보고 동아시아에 지금도 남아 있는 식민주의의 구조를 본다. 


여기까지 와서 떠오르는 의문은 지금까지 나는 박하사탕속에서 전후 일본의 역사를 반복해서 자의적으로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 역시 박하사탕을 꼭 한국의 국민사 문맥 속에 놓고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라는 점이다. 전후 일본의 국민주의는 민족·언어동일성의 범위를 일탈하는 일이 결코 없었고, 일본의 군사력에 관해서 경찰 행위와 군사 행위의 구분은 철저하게 애매했다. ‘타위대는 말 그대로 미국의 군사 시스템이나 군대를 보완하기 위해, 한국군이 용병처럼 해외에 파병되어 베트남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 참가했듯이, 미국의 통괄 아래에서 비상시에는 한반도를 포함한 해외로 내보낼 수 있도록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세계전략 안에서 제국의 식민지군 혹은 비용을 자신이 분담하면서까지 참가하는 용병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군대도 한국의 군대와 같은 지위로 착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제국에 의한 세계 통합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그러나 제국에 의한 통합을 구체적인 역사적 체험으로서 발상하기 위해서는 광주를 참조로 하는 일이 필요하다. 국민주의의 감정에 촉구되어 내전의 폭력에 가담했을 가능성은 광주 시민, 한국민을 넘어서, 슈퍼국가성 아래서 몸부림치는 우리 대부분의 숙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238)


국경을 넘나드는 학자가 바라본 광주의 의미, 박하사탕」의 해석은 정밀하면서도 마음 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