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깁니다....)
1987년,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적성국’이던 이란에 몰래 무기를 팔아 그 돈으로 니카라과 우익 콘트라 반군을 지원해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미국의 이중성을 낱낱이 드러내고 레이건에게 정치적 위기를 가져왔던 ‘이란-콘트라 스캔들’이었지요.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은 이스라엘을 중계자로 삼아 이란에 토우(TOW) 미사일을 넘겼습니다. 이스라엘을 거쳐오느라 히브리어가 쓰여져 있는 미사일을 건네받고 이란이 볼멘 소리를 냈다는 얘기(팀 와이너, <CIA- 잿더미의 유산>)도 있습니다.
2007년 4월 남미 콜롬비아에서 비밀리에 무장조직 ‘콜롬비아방위군연합(AUC)’에 무기를 대준 이스라엘인들이 체포됐습니다. 그 무렵 미국 조지 W 부시 정부는 좌파 게릴라에 맞선 콜롬비아 우파 정권의 ‘마약과의 전쟁’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AUC는 좌파 게릴라들과 싸우던 우익 민병대였는데, 실은 이들이야말로 마약갱들과 연결돼 있었다고 합니다. 미 정부가 테러조직 명단에 올려놨던 그룹이기도 했고요.
겉으로는 테러·마약과 싸운다면서 밑으로는 콜롬비아 우파 정부를 돕기 위해 우익 민병대를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내놓고 할 수 없는 ‘더러운 작업’을 이스라엘이 대신해주는 셈이었으며 그 커넥션의 일부가 이 때 드러났던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대리인’ 효용성 떨어진 이스라엘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래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런 복잡한 이해관계로 긴밀히 연결돼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가 이전 정부들과 달리 노골적으로 이스라엘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표면적인 원인이라면 원인입니다. 그래서 미국 내 우파들과 친유대 강경파들은 오바마를 맹렬히 물어뜯고 있고요.
US President Richard Nixon and Israeli Prime Minister Golda Meir meeting on 1 March 1973 in the Oval Office. Nixon's National Security Advisor Henry Kissinger is to the right of Nixon. /위키피디아
오바마 집권 뒤 하필이면 이스라엘에서는 우파 리쿠드당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집권했고, 미국과의 갈등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단순히 양국 정부의 서로 다른 성향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수행해온 ‘미국의 대리인’ 역할의 효용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전략적 상황 변화가 숨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리하는 역할을 한 것은 건국 직후부터였지만 특히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뗄 수 없는 관계가 됐습니다.
주로 영국 정보기관들과 거래하던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1956년 4월 당시 소련 지도자 흐루쇼프의 공산당 전당대회 ‘비밀연설’ 내용을 입수해 CIA에 전달했습니다. 스탈린주의로부터의 이탈을 선언한 이 연설을 입수함으로써 미국은 소련의 중대한 변화를 탐지할 수 있었으나, 그후 이스라엘에 민감한 정보의 상당부분을 의존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스라엘이 미국에 중요해진 것은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으로 친미 파흘라비(팔레비) 왕조가 붕괴한 이후였습니다.
이란 혁명 뒤 더욱 밀착된 두 나라
이전까지 중동에서 미국의 대변자는 사실 이스라엘보다는 이란이었으나, 파흘라비의 축출로 미국 중동정책의 중심축이 무너져내렸습니다. 그후 미국과 이스라엘은 더욱 밀착했습니다.
이는 미국 내 유대인들의 로비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남아공 백인정권이 민족주의 좌파성향 정권들을 무너뜨리는 비밀공작을 맡아 했듯, 이스라엘은 냉전 시기 중동·중남미 곳곳에서 반미 정권을 무너뜨린 쿠데타 세력을 지원하고 무기·용병을 공급하는 ‘용역’ 역할을 했던 것이죠. 2000년대 초반 미주기구(OAS)는 이스라엘 군수업체들이 니카라과·과테말라 등 중남미 지역과 시에라리온을 비롯한 서아프리카 일대에 무기를 공급했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습니다.
냉전이 끝난 뒤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노동당 정권은 1993년 팔레스타인과 협상해 오슬로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팔레스타인에서 2차 인티파다(반이스라엘 봉기)가 일어났고, 이스라엘에서는 강경파 정권이 들어섰지요. 그러면서 중동분쟁은 오히려 악화일로를 걸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을 잇달아 침공한 뒤 유럽에서조차 더이상 이스라엘의 행태를 좌시할 수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미국과 이스라엘도 틈이 벌어졌습니다. 그래봤자 미국은 이스라엘 편, 이라고는 해도 그 작은 변화가 이스라엘에는, 그리고 팔레스타인에는 엄청난 충격을 미칩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미사일 방어'를 명분으로 퍼다주는 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싸우느라고 경제가 나빠졌다는 이유로, 미국은 이스라엘에 돈도 빌려줍니다. 이걸 담보로 이스라엘은 상업 금융기관으로부터 저금리에 돈을 빌릴 수 있게 하는 구조라고 하는데요. 표를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스라엘이 동유럽과 옛소련권 여기저기서 유대인들을 불러들이거든요. 그래서 집이 모자란다며 팔레스타인 땅 빼앗아 정착촌 짓는 짓을 하는데, 그걸 안 하면 또 미국이 돈을 빌려준다... 참 희한한 원조도 다 있지요. ㅎㅎ
오바마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지난 수십년과 같은 상황을 더이상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보여줬습니다. 오바마는 2009년 취임 뒤 이집트 카이로에서 이슬람권과의 화해를 설파했습니다(물론 그 후의 상황은.. 쩜쩜쩜...)
2011년 5월 오바마는 중동평화 로드맵을 발표했습니다. 이 로드맵에서 오바마는 “이-팔 양측간 국경선은 1967년 당시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못박았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이 3차 중동전쟁을 일으켜 빼앗은 땅을 팔레스타인에 돌려줘야 한다고 처음으로 밝힌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무단 점령을 방치하는 것이 미국과 아랍국들 간 관계를 푸는 데에 장애가 되고 있음을 명시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를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무바라크도 없고... '틀 바꾸기' 나설 수 밖에 없었던 미국
미국으로서는 중동 전략의 프레임을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아랍의 봄’으로 이집트 군부정권이 무너진 탓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중동에서 과거처럼 이스라엘과 ‘친미 독재정권’에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죠.
최대의 앙숙인 이란과 관계를 개선하려고 나선 데에도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미국과 이란의 대화를 엄청난 위협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이란 관계가 풀리면 이스라엘의 역내 입지는 매우 좁아지기 때문에 사활을 걸고 화해를 막으려 하고 있고요. 미국 보수파도 나름의 이유(유대계 로비도 있을 것이고, 오바마가 미운 것도 있을 것이고 ㅎㅎ)로 이란과의 화해를 훼방놓고 있습니다.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23일에도 텔아비브를 방문해 오바마 정부의 이란 핵협상을 비난했더군요.
그러나....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란과의 핵 협상을 완전히 뒤집기는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핵협상이 타결된 뒤 이란이 얼마나 협상 내용을 준수할 것이냐, 미국의 차기 정권이 어느 쪽으로 갈 것이냐 등에 달려있긴 합니다만.
건국대 중동연구소 성일광 전임연구원은 “오바마 정부는 이스라엘에 특사를 파견하고 존 케리 국무장관을 보내며 중동평화협상을 진전시키려 애썼으나 네타냐후 정권의 강경한 태도 탓에 실패했고 결국 2기 들어서는 이란 핵협상에 주력하고 있다”며 “이라크 문제와 이슬람국가(IS) 문제 등에서 미국은 이란의 협력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지적합니다.
네타냐후는 지난 17일 총선에서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생긴 유권자들의 위기의식을 오히려 자극, 보수표를 끌어내 승리했습니다. 그는 총선 기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는 없을 것”이라며 오슬로 협정 이래의 원칙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두 국가 해법’을 뒤집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스스로도 2009년에 확인했던 원칙인데 말이죠. 네타냐후는 “아랍인들이 떼거리로 투표를 하러 나온다”며 자국민인 아랍계 유권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도 했습니다.
선거가 끝난 뒤 네타냐후는 ‘두 국가 해법’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며 발언을 번복했고, 23일에는 아랍계 이스라엘인 비하 발언에 대해서도 사과했습니다. 더 이상 고집부리다가는 미국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될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으로도 보입니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데니스 맥도너 백악관 비서실장은 23일 “네타냐후의 모순적인 말들에 의구심 품는 사람이 많다”고 재차 비난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습니다. 맥도너는 이스라엘이 50년에 걸친 팔레스타인 무력 점령을 끝내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공존'을 받아들일 것인가
뿐만 아니라 월스트리트저널은 24일 이스라엘이 이란 핵협상 정보를 빼내 미 공화당에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국을 상대로 스파이행위를 한 것이 처음은 아닙니다만, 두 나라 사이가 몹시 벌어져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또 폭로된 겁니다.
앞서 미국 공화당 보수파들이 이란 보수파들을 향해 '어차피 우리가 의회에서 거부할 것이니 핵협상 따위 집어치우라'는 식의 유혹(?) 메시지를 던진 적 있지요. 미국 보수파가 이란 보수파와 '결탁'해서 양국 비둘기파들의 핵협상을 파산시켜버리자는 제안이어서 파장이 일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중간 '공작'이 드러난 셈입니다. 파장이 작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나 오바마 정부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대이스라엘 결의안을 '비토'해주지 않는, 이스라엘 지킴이 역할에서 살짝 비껴서는 일도 벌어질까요? 과거에도 미국은 이스라엘이 엇나갈 때면 용돈을 끊는 부모처럼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보류하거나 줄이는 방식으로 길들이곤 했는데요.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근본적인 '리셋'이 일어날까요? 공화당은 물론 그럴 리 없다 하고, 오바마 정부도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고 있지만요.
관건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공존’을 모색하려 하지 않는 한, 미국이 이스라엘로부터 공존을 위한 조치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한 미국의 중동정책은 영원히 반쪽짜리에 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언론 하레츠는 “네타냐후의 ‘절반의 사과’로는 부족하며 진짜 문제는 그의 발언이 아닌 그의 정책”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성 연구원은 “네타냐후의 새 연정도 이전처럼 강경파들로 채워질 것”이라며 “네타냐후 정부에 대한 신뢰가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과연 미국이 어느 정도까지 이스라엘에 강경한 태도를 보일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미-이스라엘 관계 최근 연표
2008년12월~2009년 1월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과 유엔대표부 폭격에 국제사회 비난
2009년 5월
오바마 미 대통령,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팔레스타인 점령지 내 유대인 정착촌 건설 중단 요구
팔레스타인 점령지의 유대인 마을들을 지키는 이스라엘 군인들.
2010년 3월
오바마-네타냐후 백악관 회담, 의견 충돌로 공동기자회견 없이 종료
2010년 9월 오바마, 백악관에 이-팔 정상 초청해 대화 중재
2010년 9월 백악관 회담, 썰렁한 두 정상
2011년 5월
오바마 중동평화 로드맵 발표, 이스라엘에 점령지 반환 사실상 촉구
2011년 9월 오바마, 팔레스타인 유엔 가입신청에 거부권 행사하겠다고 선언
2012년 9월 네타냐후, 미국에 “이란과의 관계 명확히 선 그으라” 요구
2013년 7월 이-팔 대표들, 케리 미 국무장관 중재로 평화협상 시작
U.S. Secretary of State John Kerry, accompanied by former U.S. Ambassador to Israel Martin Indyk, launched the Israeli-Palestinian peace talks, Washington, July 29, 2013. Photo by AP
2014년 1월 이스라엘, 점령지 내 추가 정착촌 건설계획 승인
2014년 5월 이-팔 평화협상 결국 결렬
2014년 7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침공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화염과 연기가 치솟는 가자지구.
2015년 3월 네타냐후, 백악관 반대에도 미 의회에서 연설하며 이란 핵협상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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