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탕탕 총소리가 나는 순간 모두가 마비된 것 같았다. 경찰 사이렌이 들리기까지 10분간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표현의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어왔지만, 그것이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표현의 자유’ 토론회에 참석했던 현지 기자 닐스 라르센은 15일 ‘인포메이션’ 신문에 테러 현장에서 느꼈던 공포를 털어놨다. 그는 총구 앞에서 신념이 흔들렸음을 고백하면서 “이 악몽은 얼마나 지속될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악몽은 전 유럽을 뒤덮고 있다. 하루가 머다 하고 ‘묻지마 테러’에 가까운 공격이 일어난다. 프랑스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나 코펜하겐 공격처럼 종교가 빌미가 된 테러도 있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일탈된 개인들의 공격도 있다. 한쪽에선 극우파가, 다른 쪽에선 반유대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린다. 유로화와 경제통합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유럽회의론’이 정치 역학을 바꾼다. 정치·경제·사회 전반에서 유럽연합(EU)의 이상과 가치가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파리 외곽의 무슬림 거주지역. 사진 남지원 기자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안병억 교수는 이주민 2세들의 반란, 극우파의 준동과 정치 불안, 반 통합 정서 등이 모두 한데 이어진 포괄적인 이슈라면서 “그 출발점이자 방아쇠가 된 것은 경제위기”라고 지적한다. 각국에서 반이민 그룹이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하고 무슬림 청년들의 반발이 터져나온 데에는 2008년 이후의 경제위기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EU라는 초국가기구는 이런 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리더십도 없다. 그리스에서 극좌파 시리자가 집권한 것은 EU가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지난 9일 그리스 스카이방송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2%는 시리자 정부가 유럽 채권단 트로이카(EU·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와 정면으로 맞서는 걸 지지했다.
그리스가 보여주듯 경제위기 이후 유럽의 정치지형은 급변하고 있다. 올해 유럽에서 8개국이 총선을 치른다. 지난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약진했던 반EU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올해에도 세력을 키울 것으로 예상된다.
오는 5월 영국 총선에서는 극우파 영국독립당(UKIP)이 캐스팅보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 보수당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0%가 EU 탈퇴를 원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지난해 말 스웨덴은 반이민 극우 정당의 고집 때문에 연정 붕괴 위기를 겪었다. 경제위기가 아니었다면 탄생하기 힘들었을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각국 의회에 진출하고 있다. 이는 유럽 전역에서 정치적 불안정이 상당기간 계속될 것임을 보여준다.
정치·경제적 동요는 내부의 분열과 공동체 가치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좌절한 무슬림들뿐 아니라 백인우월주의자들이나 반유대주의자들도 그들 나름의 지하드(성전)를 벌이고 있다. 2011년 7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노르웨이 극우 테러범 아네르스 브레이비크 사건이 그런 예다.
포린폴리시저널은 경제난이 일상화된 뒤 극우파가 준동하는 유럽의 현실을 1930년대 대공황 뒤의 상황과 비교하기도 했다. 단순 비교는 힘들지만,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늘어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징후라는 지적들이 나온다. 프랑스 동북부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유대인 공동묘지의 무덤 수백기가 훼손돼 15일 당국이 조사를 시작했다. 최근의 혼란 속에 유럽에서 가장 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대테러전의 여파를 우려하는 무슬림 공동체, 반유대주의 득세를 경계하는 유대계 주민들, 추방과 격리 속에서 살아가는 동유럽 출신 로마족(집시) 같은 소수집단들이다. 이 모든 현상들은 ‘민족과 국경을 넘어선 공동체’를 향한 유럽의 이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70년 가까이 쌓아온 EU의 틀이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내부의 도전들로 인해 유럽의 위상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안 교수는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미국을 견제해온 ‘유럽이라는 브랜드’가 흔들리고 있다”면서 EU를 모델로 한 다른 지역의 통합 움직임도 약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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