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의 혁명기념관에 이어... 톈진의 저우언라이 기념관.
톈진의 난카이대학(南开大学) 안에 있다. 난카이대학은 저우언라이, 원자바오 두 총리를 배출한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저우언라이는 '난카이중학'을 졸업한 것이니 엄밀히 따지면 난카이대학 출신은 아니고, 고향도 톈진이 아닌 장쑤성 화이안(淮安)이다. 하지만 어찌됐건 저우언라이 기념관은 톈진에 있고, 나는 거기에 다녀왔다는 사실.
대학 입구.
기념관 옆에 있는 비행기.
기념관 안에 들어가면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 부부. 덩잉차오는 유명한 사회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였다.
함께 간 신화통신의 리미 말로는, 중국에서 '누구누구 총리'라 하지 않고, 이름 안 붙인 채로 그냥 '총리'라고 하면 아직도 저우언라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이 사진은 재미있었다. 저우언라이의 젊었을 때 모습. 왼쪽에서 두번째, 여장을 한 사람이 저우언라이다.
얼굴이 곱상하게 생겨서, 남학생들끼리 연극을 하면 늘 여장을 하고 여성 역을 도맡았다고.
리미의 설명을 한참 듣다가... "그러니까, 요는 저우언라이가 잘생겼기 때문에 인기라는 거잖아." 끄덕끄덕. ㅋㅋ
역사적인 장면들을 기념관에서 보는 것.
책이나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봐도 되겠지만, 역시 기념관에서 보는 것은 각별하다. 저우언라이의 인생은 곧 현대 중국의 역사이고, 그 흐름을 쭉 따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혁명의 꿈에 부풀었던 젊은 청년이 노련한 정치인이 되어 세계 무대를 주름잡고, 어느새 노정객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쩐지 나도 가슴이 시큰.
말년의 저우언라이는 많이 말랐다.
저우언라이와 문화대혁명의 관계...는 참으로 애매하다. 문혁의 참담한 결과 때문에 숱한 정치인들이 나중에 비난을 받았지만 저우언라이는 그런 비판도 피해가는 듯 보인다(이 시점에서 '왜 아르헨 축빠들은 유독 바티스투타에게는 면죄부를 주느냐'고 했던 어느 누구의 말을 떠올리는 나;;). 저우언라이는 문혁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나서서 지지하지도 않았다. 혹자의 말을 빌면 "숙청당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역시나 저우언라이를 편들어주는 말. ^^
저우언라이 부부.
전시관 아래층 출구 쪽에 저우언라이의 모습을 본떠 만든 모형이 있는데 정말 잘 만들어서 꼭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사진은 찍지 못하게 해서 못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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