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 지난 24일 유엔 총회 연설 이래, '로하니 바람'이 한바탕 국제 무대를 휩쓸고 지나간 것 같습니다. 오바마와의 회동설(비록 불발로 끝났지만), 예상치 못했던 전화 통화, 이란 대통령과 외무장관 등의 잇단 미 언론 인터뷰 등등.
하지만 그 와중에 찬사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28일 테헤란으로 돌아간 로하니는 군중들의 환호와 함께 일부 반대파(보수층) 시위대의 '달걀, 신발 투척 시위'에 부딪쳤다지요. 이런 국내 반발을 의식한 듯, 자바드 자리프 외교장관이 미국서 열심히 미국 방송에 나와 인터뷰를 하며 화해 뜻을 전할 적에 압바스 아락치 외교차관은 테헤란에서 "우리는 절대로 미국을 100% 믿지 않는다"며 보수파들을 향한 메시지를 날리고 있었다고...
Dueling Narratives in Iran Over U.S. Relations - NYTimes.com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로하니가 24일 연설할 때에 뉴욕 유엔 본부 앞에서 '이란계 미국인들'의 반 로하니 시위가 벌어졌다는 겁니다. 뭐 이거야 다분히, 당연히도, '정치적인' 행사였습니다. 9월 1일 이라크에 머물던 이란 '반정부인사' 52명이 몰살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로하니 반대" 시위한 이란계 미국인들
살짝 설명을 하자면,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뒤 혁명세력에 반발한 집단이 크게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당연히 쫓겨난 파흘라비 왕조 지지자들이고요. 또 하나, 아주 소수이긴 하지만, 인민전사(무자히딘 할크)라 불리는 극좌파 조직 등 반 이슬람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사담 후세인 시절 이라크에 둥지를 튼 적 있고, 일부 이란 반체제 집단이 여전히 이라크에 캠프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란이 얼마 전 국경 너머 이라크의 반체제 캠프를 공격해 52명을 학살했습니다(용어에 대해 군소리 하자면, 저는 사람을 많이 죽인 건 다 '학살'이라고 부릅니다. 가해자가 누구고 피해자가 누구든지 간에).
Iranian-Americans rally against Rouhani near United Nations
뉴욕의 시위대는 이 일을 들며 "로하니는 학살 책임자"라 비난했습니다. CNN방송 iReport에 이 날의 시위 풍경이 보도됐습니다. 재미난 것은 Producer note라는 겁니다. 웹사이트에 덧붙여진 시위 취재 노트를 보자면, 당초에는 CNN 취재진이 오바마의 연설을 취재하려고 유엔본부 앞에 갔다가 일군의 시위대를 보게 됐다는 건데요.
"그들의 주된 메시지는 아슈라프 캠프의 반체제인사 52명 학살과 같은 로하니 정권의 인권침해에 대한 항의였다. 그런데 지난해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유엔에 왔을 때 항의 차 열린 집회와는 달랐다. 보안이 그 때보다 더 철저했고, 연설자들은 더욱 열정적이었다. 로하니 때문에 이란 정권이 마치 핵 야심이 없는 양, 세계 평화를 바라는 양 비칠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이 시위를 주도한 것은 '이란 민족저항협의회' 의장 내정자 마리얌 라자비 등 이란 현 정부에 반대하는 이란계 미국인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란계가 아닌 인사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JFK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의 아들인 패트릭 케네디 전 하원의원, 공교롭게도 한국계 사업가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정치생명 끝장났던 로버트 토리첼리 전 상원의원,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을 지낸 마이클 스틸, 부시 행정부 시절 꼴통으로 유명했던 전 주유엔대사 존 볼튼... 이란을 미워하는 끈떨어진 정치인들의 모임 같은 느낌도 드네요 ㅎㅎ 이들 모두 로하니의 '인권 침해 범죄'를 규탄했습니다. 세상에 인권 걱정하는 사람들 참 많아요..................................
이 시위를 보면서, 미국에 사는 이란계에 시선이 미치게 됐습니다. 이른바 '페르시안 디아스포라'. 전에는 미국에서도 주로 '페르시안 아메리칸'이라 불렸는데, 근래에는 '이라니안 아메리칸'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는 추세라고 합니다. 이민자들 중 대부분은 이란의 여러 민족 중에서도 다수파인 파르시(페르시아계)이고, '이란 이슬람공화국'에 대한 적대감정이 많아 페르시아라는 호칭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근래에는 이들 공동체 안에서 파르시가 아닌 이란계(예를 들면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아제르인, 아랍인 등 민족적 갈래가 다른 이란 출신들)까지 포괄하는 '이라니안 아메리칸'이라는 호칭이 일반화되고 있다네요.
호칭이야 어찌 됐든, 이들에 대해 좀더 알아볼까요.
소득 많고 교육수준 높은 이란계 미국인들
미국에는 현재 100만명 가량의 이란계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조상이 이란계인' 사람들의 숫자를 세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2000년 미국 인구센서스에서 스스로 이란계라 밝힌 사람의 수는 33만8000명. 하지만 이보다는 훨씬 많다고 봐야겠죠. 이란계가 사실은 200만명에 이른다는 추정치도 있다고는 하는데요.
미국 내 이란계 단체의 웹사이트 캡쳐. '평화와 인권의 모멘트를 붙잡도록, 오바마에게 촉구하자'.
매서추세츠 공과대학(MIT) 조사팀이 2004년 추적조사한 결과 이란계의 수는 69만1000명, 센서스의 2배 정도였습니다. 2009년의 또 다른 조사에서는 약 100만명으로 추정됐습니다. 그 중 절반은 캘리포니아주, 특히 로스앤젤레스에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곳 이란인들은 자기네가 사는 도시를 '테흐란젤레스' 혹은 '이란젤레스'라 부르기도 한다는 군요. 그 외에 뉴욕/뉴저지주에 9.1%, 워싱턴과 메릴랜드/버지니아에 8.3%, 텍사스에 6.7%가 사는 걸로 조사됐습니다. 제가 종종 참고하는 페이반드에 지난해 나왔던 내용입니다.
이들이 미국에 오게 된 데에는 파흘라비 정권이 이중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79년 혁명 이전 미국에 온 이란인들 상당수는 유학생입니다. 이란은 혁명 전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절대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했지요. 왕정은 차세대 엘리트 교육을 미국에 위탁하다시피 했습니다.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가며 미국에 유학을 보냈고, 이 엘리트들은 이란으로 돌아와 왕정의 요직을 맡아 나라를 이끌 예정이었습니다.
위키피디아에 인용된 자료입니다. 중동의 '두뇌 유출(brain drain)'을 연구한 악바르 토르밧의 2002년 논문에 따르면 1977~78학기 미국에는 3만6220명의 이란 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4만5340명, 그 이듬해에는 5만1310명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1978-79년 미국 내 외국인 유학생(26만3983명)의 17%가 이란 학생들이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왕정의 지원을 받는 학생들, 혹은 왕정의 요직에 있었던 부유층 자제들이었겠지요. 혁명이 일어나고 왕정이 무너지자 이들은 미국에 눌러 앉았습니다. 혁명 뒤 왕정 지지자들과 기득권층이 대거 이란을 탈출해 망명했는데(이것을 '페르시안 디아스포라'라고 부르죠) 대부분은 유럽과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로하니 '붐'을 바라보는 이란계의 양가 감정
유학생 출신이 상대적으로 많았다는 점, 힘있고 돈 있던 자들이 많이 왔다는 점 등 여러가지 요인들로 해서, 미국의 이란계는 다른 이민자 집단보다 유리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있었습니다.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들의 '국적'입니다. 이란계라고는 하지만 미국 시민권자가 81%, 영주권자가 15% 정도. 이란계 미국인 가구 중 3분의1은 연간 소득이 10만달러 이상. 전체 미국 가구 중 10만달러 이상의 연소득을 가진 가구가 5분의1이라는 것과 비교하면 꽤 높은 소득수준인 셈이죠.
교육수준도 높습니다. 이란계 이민자 혹은 그 후손의 50.9%가 학사학위 소지자(2000년 센서스). 미 상무부 2012년 자료에 따르면 67개 소수민족 집단 중 대만계 다음으로 이란계의 학사학위 소지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나름 알려진 이란계 인사로는 이베이 창업자 피에르 오미디야르, 프로디아 시스템스 설립자 겸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여행객이 된 아누셰 안사리, CNN 종군기자로 유명한 크리스티안 아만포 등이 있지요. 테니스 선수 안드레 아가시도 이란 혈통이고요.
그런데 이란계 '정치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란계 미국인들은 경제, 학술, 특히 과학기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왔지만 유독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2008년 조그비 인터내셔널 조사에서 이란계 미국인의 절반은 민주당 지지, 8분의 1 정도는 공화당 지지로 나타났다고는 합니다만...
앞서 '반 로하니 시위' 이야기를 했는데, 이들 이민자 집단은 미국과 이란 간 화해 움직임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친 파흘라비 색채가 강했던 이들이므로 현재의 이란 정권에 반대하고, 따라서 화해를 꺼림칙하게 볼지, 아니면 떠나온 조국이 미국과 친해지고 제재에서 벗어나 승승장구하기를 바랄 지. 아마도 둘 다 아닐까 싶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롱아일랜드 신문 하나가 자기네들 지역의 이란계 공동체 사람들을 만나봤네요.
비교적 부유하게 살고 있는 이들 이란계는 오바마 정부에 "천천히, 한 걸음씩, 이란 정부가 개혁을 실천하는 걸 봐가며 손을 내밀어라" "하룻밤 새 사이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이란 보수파는 그렇게 쉽게 변할 자들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조금은 냉소를 섞어, 하지만 기대를 감추지 않으면서, 오바마 정부에 '신중한 관계 개선'을 주문합니다.
미국에서 대표적인 이란계 공동체 기구인 전국이란계미국인협의회(NIAC)은 단체 소개글에서 가장 먼저 "우리는 이란공화국을 위해 로비하는 단체가 아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란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 '이란계 미국인 공동체를 위한 조직'이며, 이란의 인권침해에 반대하고 이란의 인권을 개선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고 거듭거듭거듭 강조합니다. 미국 내에서 이란에 덧씌운 이미지가 워낙 나쁜 탓도 있겠지만... 정작 '미국인'인 이란계는 이란 내부 문제에는 별반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통계도 있습니다. 나서서 이란 인권을 제기하는 것은 이란계 공동체 내에서도 일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 미국과 이란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질 지, 그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이란이라는 나라는 어디로 향할지에 따라 미국 내 이란인들의 생각과 처지도 변화를 겪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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