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딸기의 하루하루

카우보이 비밥.

딸기21 2003. 12. 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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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만 되면 마루에 상 펴고 앉아 손으로는 퍼즐을 풀면서, 귀로는 투니버스에 몰두하던 시절이 있었다. 주 메뉴는... 워낙 여러가지였기 때문에 다 생각나지는 않지만, 정해진 시간이면 '시티헌터'가 나왔었다. '우수한''사우리'라는 놀라운 이름(어쩜 저렇게 멋지게 한국화된 -_-)의 콤비가 나오는 시티헌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끝나면 항상 카우보이비밥이 흘러나왔었다. 내가 자발적으로 시청을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흘러나왔다'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멋모르고 틀어놨던 테레비에서 흘러흘러나온 비밥.


첫 느낌은? 어땠는지, 표현하기 힘들 때에, 주변의 누군가가 아주아주 정확하게도 '불쾌하다'는 표현을 썼었다. "난 카우보이 비밥을 보면 불쾌해져".

 

비밥이 불쾌한 이유는,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의 비주얼에서 뭔가 아름다운것, 판타지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비밥은 그런 욕망을 철저하게 배신하는 영화다, 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때는 서기 ****(몇년인지 모름)... 대체 이 우주의 꼴은 어찌나 엉망인지. 감독이란 놈이 무정부주의자가 아니고서야. 우주는 이미 '개척' 되었거나, 혹은 '개척' 중이다. 전근대와 현대와 미래가 뒤죽박죽이 되어 공존하는 것(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적나라하게 구현된) 외에도, 시청자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주인공들이 통 잘나지를 못했다.


주인공격인 스파이크 스피겔 저놈만 봐도 그렇다. 은은히 흐르는 재즈의 선율, 한손에 시가를 쥔 우아한 액션남...이었으면 오죽 좋았겠냐마는 전혀 아니다. 울랄라 스타일의 곱슬머리에 담배를 꼬나물고 분위기 깨나 잡는, 약간은 양아치스러운 놈이다. 여주인공격인 페이 발렌타인은 '육체파 미녀 여형사'를 흉내내다 만 것 같은 인간인데 입만 열면 밉살스런 말이 튀어나오는 그런 여자분이시다. 남자앤지 여자앤지 알 수 없는 외모를 가진 여자아이 에드, 한 덩치 하시는 젯 블랙 아저씨... 모두 후줄근하다. 이런 인간들로 애니를 짜놓다니!

 

몹시 불쾌하던 와중에, 넘 심심해서-- 왜 불쾌한지 생각해보니깐 이노무 애니메이션 속에 통찰력이란 놈이 숨어있더라는 것이다. 약간씩 덜떨어진 저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무법천지이고 그들이 사는 시대는 서부개척시대다. 무주지 선점, 힘 가진 자가 최고, 빼앗으면 내 것, 법도 없고 정의도 없는. 별로 정의롭지 못한 저놈들한테 딱 맞는 시대와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저 시대 저 장소에서는 비밥 호에 타고 있는 저 놈들이 인간군상의 전범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국가기구라든가, 전우주적인 사법체계, 복지국가 같은 것은 없다. 우주의 사법(정의)''''이다. 죄지은 놈이 있으면 홈쇼핑 광고하듯 쇼걸이 테레비에 나와서 현상금을 읊어준다. 범죄를 제어하는 것은 비밥호의 4인 같은 카우보이들이다


미국 서부시대의 카우보이들은 소를 몰고 다녔지만 우주시대의 카우보이들은 현상범을 찾아다닌다. 그런데 왜 재즈는 자꾸 흘러나오는 거야, 기분 나쁘게! 압도적으로 음울하면서도 화려한 영상, 심금을 뒤집는 우울한 음악, 디스토피아를 그다지 지겹지 않게 그려놓은 괴상한 시대의식, 그런 것들이 어우려져 '불쾌한 중독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결국 중독이 되어버렸고, 정의롭지 못한 비밥호 승무원들에게 뿅가버렸다.

 

몇 달 전에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맞나? SICAF...) 한다고 해서 푸른여우님과 코엑스 홀에 가서 비밥 극장판을 관람했다. 재미있었다. 워낙에 티브이 시리즈물도 옴니버스 식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전편을 보지는 못했었기 때문에 언제 한번 날 잡아 몽땅 봐버려야지 하는 욕심이 있었는데, 비밥을 극장에서 대형 화면으로 볼 수 있다면야! 영화는 멋졌다





티브이 시리즈는 '돈 안 되게' 만들어진 매니아적 속성이 강했던 반면에 극장판은 '돈 되는' 액션과 화면으로 가득해서, 일단 보기에 재미가 있었다. 특히 도입부 음악 나오는 부분은 일본 애니의 섬세함과 기술력을 그대로 보여준다(이건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거니깐 말로 설명 않겠다). 다만 좀 실망스러웠던 건 영화의 성패 여부와 상관없이, 재즈가 락 음악으로 바뀐 것처럼 그 우울한 시대상보다 현란한 액션이 우선 눈에 띈다는 점. 영화 자체의 완결구조나 기술적 완성도는 완벽에 가깝지만 멜랑꼴리 야리꾸리한 감성이 액션과 비주얼에 가려진 것 같아서 좀 아쉽긴 했다.


암튼 갑자기 비밥 얘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히히히 <카우보이 비밥 The Movie-천국의 문> DVD를 오늘 아침 입수했다는 자랑을 하기 위해서다. 으걀걀... 신난다. 엄청 신나고 있다. 언제라도 상영회를 열 마음이 넘치고 있으니 보고 싶은 분 있으면 놀러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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