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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

딸기21 2013. 9. 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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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 -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소개글 옮기고 

사진들은 www.lomography.com 에서 퍼옴


이번 전시회에는 20세기 최고의 사진작가로 꼽히는 로버트 카파의 작품 160점이 선을 보인다. 이 작품들에는 헌신적인 기자이자 예술가였던 카파의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카파의 친구였던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은 그의 사진에는 따뜻한 마음과 동정심이 들어있다고 평한 바 있다.



카파는 스페인 내전, 중일전쟁, 2차 세계대전, 1차 중동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등 다섯 번에 걸쳐 전쟁을 취재했다. 하지만 카파를 단순히 종군기자로 분류할 수는 없다. 그는 전쟁에서 겪게 되는 모든 경험들을 찍고자 했다. 전쟁의 부당함을 규탄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승리와 평화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 또한 그리고자 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시적이면서도 위트 있게 표현하고자 했다.

 

카파는 결국 전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는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 도중 지뢰를 밟고 목숨을 잃었다. 카파의 장례식에서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인생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치열하게 인생을 살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모조리 삶에 쏟아 부었다. 용감하고 치열하고, 드물게 고결한 삶이었다.”

 

초창기 작업과 프랑스에서의 생활 1932-1939

 

카파가 사진기자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33년이었다. 하지만 그를 맞은 것은 배고픔뿐이었고, 뒤에 몽파르나스의 난민 공동체 속에서 동지애를 발견한 뒤에야 괴로움이 누그러졌다. 오래지 않아 그는 독일에서 온 젊은 여성 게르다 타로를 만났다. 타로는 카파의 연인이자 매니저가 되어, 카파의 사진작업에 대해서도 중요한 조언들을 해주었다. 카파는 파리와 프랑스 사람들을 사랑하게 됐다. 영국 출신의 소설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카파를 프랑스 사람들보다 더 프랑스 사람 같다고 했을 정도였다.

 

1936년 카파는 파리에서 일어난 인민전선의 행진과 집회, 연좌농성들을 취재했다.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전선을 형성해 당시 부상하고 있던 파시즘의 위협과 싸우고 있었다. 카파는 인민전선의 행사들을 찍은 사진들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정치적인 주제들도 많이 찍었고, 1930년대 후반 파리지앵들의 익살스러운 모습을 담은 작품들도 많이 남겼다.

 

스페인 내전 1936-1939

 

19367,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파시스트들과 왕당파 연합세력이 스페인에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공화정부를 전복시키면서 자유주의-좌파 진영과의 내전이 시작됐다. 카파는 게르다 타로와 함께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북동부 카탈루냐와 아라곤, 남부 안달루시아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내전이 발발하고 두세 달 만에 파시스트 군대는 마드리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온 자원병들은 국제여단을 구성하고 마드리드를 파시스트들로부터 지켜냈다. 프랑스 신문 르가르는 카파가 찍어 보내온 마드리드 봉쇄 사진들, ‘박해당하는 수도를 게재하며 비범한 사진들이라 평했다. 카파는 이 사진들 밑에 이 전쟁에서 누구에게도 안전한 곳은 없다죽음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교묘한 죽음이 후방의 여인들까지도 찾아내고야 만다고 적었다.



19377, 카파의 연인 타로가 탱크에 치여 숨지고 만다. 상심한 카파는 스페인을 떠나 미국 뉴욕과 중국을 떠돌다가 1938년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파시스트 군대의 폭격기들은 더욱 더 맹렬하게 이 도시를 폭격하고 있었다. 카파가 남긴 감동적인 사진들 중 상당수가 19391월 프랑스 국경을 넘어가는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대탈출을 담은 것이다. 국경을 넘는 데 성공했지만 프랑스 남부의 열악한 임시 수용소에 갇히게 된 공화파 난민들 수천 명의 비극적인 운명을 담은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다.

 

멕시코 슈트케이스

 

200712월 말, 카파의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는 ICP에 작은 상자 3개가 전달됐다.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서 머나먼 미지의 여정을 거쳐 온 상자들이었다. ‘멕시코 슈트케이스라 불리게 된 이 상자들 안에는 스페인 내전 시기 카파가 찍은 사진의 네거티브 필름들이 들어 있었다. 이 필름들은 2차 세계대전 초반인 1939년 파리에 있던 카파의 스튜디오에서 사라졌으며 오랜 세월 행방을 놓고 소문만 무성했다. ICP 창립자이자 카파의 동생인 코넬 카파가 이 필름들을 열심히 수소문하고 추적했지만 소용없었다. 필름이 들어있던 가방들은 전란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진 뒤 멕시코의 한 영화감독 손에 들어가 있었다.


멕시코 슈트케이스의 소재는 1995년 세상에 알려졌으며 오랜 협상 끝에 ICP에 반환됐다. 마침내 열린 상자 안에는 160롤의 필름이 들어있었다. 카파와 타로, 그리고 스페인 내전을 취재했던 또 다른 유명 사진작가 침(본명은 데이비드 세이무어)의 사진들이었다. 멕시코 슈트케이스에서 나온 카파의 사진들 중에서도 일부가 이번 전시에 소개돼 있다.

 

중국 1938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사이, 아시아에서는 중국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이 파시즘에 맞선 서부전선이라면 중국의 내전은 그 동부전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카파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독일, 이탈리아와 연합한 일본군은 19377월 중국을 침략했다. 만주에 세워진 일본 괴뢰정부를 공인받고자 하는 것이 일본의 속셈이었다.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는 일본에 맞서기 위해 숙적인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스페인 내전을 담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카파가 중국에서 찍은 사진들은 전쟁이 모든 나라를 어떻게 폭력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보여준다.

 

네덜란드 출신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요리스 이벤스와 함께 중국에 간 카파는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384월 초 타이얼좡 전투의 감격스러운 승리를 취재했다. 국공 연합군은 산둥(山東)성 타이얼좡(台儿庄)에서 일본군에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뒀다. 또 카파는 당시 중국의 임시수도였던 한커우(漢口)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일본군의 공습이 불러온 참상을 기록했다. 이벤스와 함께 시안(西安)과 광저우(廣州)를 여행하기도 했고, 일본군 공격을 막는다는 이유로 장제스 군이 황허의 댐을 파괴해 홍수가 난 정저우(鄭州) 일대를 취재하기도 했다.

 

카파는 서부의 옌안(延安)에 있는 공산당 기지를 찾아가 마오쩌둥을 만나보고 싶어 했으나 장제스 정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카파는 19389월 말 중국을 떠났고, 곧이어 한커우는 일본군에 함락됐다.




멕시코 1940

 

카파는 1939년 뉴욕으로 가 <라이프> 잡지와 계약했다. 이번에 주어진 주제는 사람들의 가벼운 일상이나 미국 국내 뉴스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1942년 봄까지 카파는 미국에 머물면서 태평양에서 대서양까지 전국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과 일본의 중국 침략 현장을 누비던 명민한 기자에게 이런 종류의 취재 지시는 조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나마 카파가 실망감을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은 19406개월 정도 멕시코를 취재했을 때였다. <라이프>는 그에게 멕시코 대통령 선거의 기록들을 담으라는 주문을 했다. 그해 77일 대선 당일 아침에 카파는 투표소를 찾아가 투표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싸움을 찍었고, 오후에는 야당의 대규모 시위를 사진으로 담았다. 그 순간 선거에서 승리한 여당 측이 야당 시위대에 발포했고, 하루 동안 최소 3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백 명이 다쳤다. 그런데도 이 선거는 멕시코 역사상 가장 평온한선거로 기록됐다.


2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1943

 

역설적이지만 세계 최고의 전쟁 사진기자라 불리던 카파는 2차 대전이 한창인데도 전쟁터에 취재를 갈 수가 없었다. 어떤 매체도 그를 종군기자로 고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헝가리 국적인 데다 좌파 잡지들과 일했던 경력 탓에 그는 전쟁취재에 필요한 보안 허가를 얻기 힘들었다. 1943년이 되어서야 카파는 미군 종군 사진기자 겸 특파원으로 취재할 자격을 얻어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향했다. 미군이 인정한 종군기자 중 적국 출신은 그가 유일했다.

 

그 해 여름 카파는 연합군의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점령을 취재했다. 시칠리아 북부에 있는 트로이나 마을을 두고 벌어진 독일군의 포위작전을 찍기도 했다. 크게 다친 딸아이를 안고 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찍으면서, 어쩌면 카파는 스페인 내전의 기억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카파는 시칠리아에서 이탈리아 본토로 넘어가, 소렌토 반도에서부터 북진해 나가는 연합군을 따라가며 취재했다. 나폴리에서 그는 연합군 상륙 전 독일군의 총과 화기를 훔쳐 독일군에 반격하다 숨진 20여명의 학생 의용군 장례식을 찍었다. 슬픔에 잠긴 어머니들을 지켜본 카파는 이것이 승리의 진짜 모습이라고 적었다.

 

2차 세계대전, 프랑스 1944

 

‘D데이194466일이었다. 카파는 여명 직전 노르망디 바닷가에 도착했다. ‘오마하 해변이라는 작전명 아래 여명 직전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한 미군 GI 최선봉과 함께였다. “총탄이 내 주변 물가를 스치며 수면에 구멍들을 남겼다. 나는 가까이 있던 철제 장애물 뒤로 몸을 숨겼다.” 훗날 카파는 자서전 <그때 나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Slightly Out of Focus)>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었고, 좋은 사진을 찍기엔 너무 어두웠다. 하지만 회색빛 바다와 회색빛 하늘은 히틀러가 설치해놓은 초현실적인 방어물들 사이로 군인들이 민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포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카파가 찍은 네거티브 사진들은 영국 런던에 있는 타임 사() 암실로 옮겨졌으나, 10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망가졌다. 암실 작업자가 필름을 말리면서 온도를 너무 높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프>는 이 사진들을 실으면서 너무나도 격정적인 순간에 카파가 흥분하면서 손이 떨려 사진이 흐릿해졌다고 잘못된 설명을 올렸다.

 

카파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함께 미군 기갑부대를 따라 노르망디에서 파리 외곽으로 이동했다. 825일 그는 프랑스 기갑사단에 합류, 파리의 해방을 선봉에서 지켜봤다. 파리 시절 단골이었던 술집에서는 포옹과 샴페인으로 카파를 환영했다. 랭카스터 호텔의 고급스러운 객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카파의 둥지가 됐다.

 

2차 세계대전, 독일 1945

 

19453월 말 카파는 미군 낙하산 부대와 함께 독일에 들어갔다. 다행히 카파는 들판에 착륙했지만 병사들 중에는 높은 나뭇가지에 걸려 착륙하지 못한 채 사살된 이들도 많았다. 어떤 병사들은 비행기가 통제에서 벗어나 추락하면서 숨지기도 했다. 낙하산 부대원들은 곧 독일군 부대와 맞닥뜨렸다. 불타는 농가를 버리고 달아나던 농민들도 만났다.

 

2~3 주 뒤 카파는 미군 부대와 함께 라이프치히에 입성했다. 라이프치히는 게르다 타로의 고향이었다. 카파가 그곳의 한 아파트 건물 발코니에서 자동소총을 멘 미군 병사를 찍고 있는데, 그 순간 거리에서 저격수의 총탄이 날아왔고 젊은 병사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위험한 순간을 여러 차례 모면한 카파는 2차 대전 기간 스스로를 가리켜 가장 마지막까지 죽지 않을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소련 1947

 

2차 대전 후 소련은 서방 사진작가들에겐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카파의 친구인 스타인벡은 소련 당국으로부터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라는 칭송을 받고 있었다. 카파는 운 좋게도 스타인벡과 함께 소련에 갈 기회를 잡았다. 두 사람은 1947년 여름 한 달 동안 소련을 방문해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현재의 볼고그라드), 조지아, 우크라이나 등을 여행했다.

 

좋은 기회였지만 카파에게 소련은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던 듯하다. 이듬해 스타인벡과 함께 발표한 <러시안 저널>에서 카파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 19000만명의 러시아인들이 모두 나에게 비협조적이다. 그들은 길모퉁이에 모여 떠들어대지도 않고, 시끌벅적하게 자유연애를 하지도 않는다. 모범적이고 도덕적이고 근면한 사람들, 사진작가에겐 애플파이만큼이나 지루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러시아식 생활방식을 좋아하는 것 같고, 사진 찍히는 건 싫어하는 것 같다. 전쟁과 혁명을 찍어온 내 카메라 넉 대도 짜증난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뭔가가 잘못되곤 한다.”



이스라엘 1948-1950

 

카파는 텔아비브에 머물며 1948514일 이스라엘의 건국 선포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그는 6주 동안 그곳에 머물며 아랍 이웃들을 상대로 한 이스라엘의 독립전쟁과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지켜봤다. 그는 이스라엘군을 보며 스페인 내전 초창기의 인민전선 군대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들의 열정이 똑같았고, 정치적 견해와 직업과 나이가 제각각이라는 점도 똑같았다.”

카파는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까지 이어진 긴급 수송로, 이른바 버마 도로의 건설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도로가 완공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6114주간의 정전협정이 발효됐으나 이스라엘 극우파들이 11일 만에 무기를 반입하려 시도하면서 협정이 깨졌다. 이스라엘 정부군은 우익들의 무기를 싣고 온 선박 알탈레나 호에 발포하며 텔아비브 입항을 막았다. 해변에서 이 장면을 찍을 당시 총알이 카파를 스치기도 했다.

 

카파는 1949년과 1950년 두 차례 더 이스라엘을 방문해 유럽에서 들어온 유대인들이 머무는 열악한 수용소와 구직난 등을 취재했다.


친구들

 

카파와 술이라도 한 잔 했던 사람은 누구든 그를 친한 친구로 여겼다. 카파의 친구들 중에는 기라성 같은 이들도 많았는데, 그들 대부분은 카파처럼 떠돌아다니는 사진작가나 기자들이었다. 카파가 전화 몇 통만 돌리면 파티와 포커게임 판이 벌어지고 우정이 되살아났다.

파리에서 카파가 친하게 지냈던 그룹은 주로 미국에서 온 체류자들이었다. 헤밍웨이, 스타인벡, 작가 어윈 쇼, 유머작가 아트 버크월드, 극작가 피터 비어텔, 영화감독 존 휴스턴과 아나톨 리트박 등이었다. 파블로 피카소와 그의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도 카파의 좋은 벗들이었다. 카파가 1947년 공동 설립한 사진에이전시 매그넘의 작가들도 빼놓을 수 없다.

 

전후의 유럽 1947-1954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카파는 파리에서 매그넘 대표로 일하며 젊은 사진작가들의 채용과 교육을 비롯한 매그넘 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오후에는 경마장, 저녁에는 나이트클럽을 찾아 파리 사람들의 화려한 나날을 함께 즐겼고 겨울에는 스위스에서 스키를 타며 휴가를 보냈다. 알프스의 여러 스키장들에서 보낸 시간을 담은 기사를 사진과 함께 <홀리데이> 매거진에 싣기도 했다.


마티스 작품들보다 훨씬 맘에 드는, 카파가 찍은 마티스의 사진


일본 1954

 

카파는 1930년대에 파리에 머물던 젊은 일본 영화감독 2명과 친구가 됐으며, 그들과의 인연 덕에 1935-1936년 마이니치신문 파리 지사에서 잠시 일했다. 두 친구는 전후까지도 카파와 계속 연락을 유지했고, 카파가 1954년 사진잡지 창간차 일본을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카파는 일본에서 도쿄, 교토, 나라, 오사카, 고베, 아마가사키 등을 여행하며 주로 아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게이샤들의 모습과 도쿄에서 벌어진 노동절 행진 등을 찍기도 했다.

 

인도차이나 1954

 

일본에서 3주를 보낸 카파는 <라이프>의 다른 사진기자를 대신해 베트남에 한 달 동안 취재를 하러 떠났다. 베트남 공산당과 독립연맹(베트민)은 프랑스 점령군을 상대로 1946년 독립전쟁(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시작했다. 19543월 전쟁은 최고조에 이르러, 베트민 병사 6만명이 디엔비엔푸에서 제국주의 군대 13000명을 포위했다.


카파는 57일 하노이에 도착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디엔비엔푸는 베트민에 함락됐다. 카파는 현재의 라오스 북부에 있는 루앙프라방으로 이동했으나, 베트민이 포로로 잡은 프랑스군 중 부상병 750여명을 석방하겠다고 발표하는 바람에 하노이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카파는 홍강 삼각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취재하러 떠났다. 525일 그는 프랑스 군인들과 함께 남딘과 타이빈을 방문했다. 호위차량이 잠시 멈춰 서자 카파는 파견대와 함께 길에서 벗어나 들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카파는 대인지뢰를 밟고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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