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일본의 황태자 마루히토(44)가 아내 마사코(40)의 역성을 들며 '황실 안에 마사코를 억압하는 이들이 있다'는 의미의 발언을 한 것을 놓고, 일본 언론들이 황실 내부 갈등설을 연달아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직 딸(3) 하나밖에 없는 마사코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으라'는 압력 때문에 부담을 느껴 요양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주장에서부터, 황후와 마사코의 고부갈등설까지 퍼져 궁내청 안팎이 시끄럽다는데요. 황실에 관한 일련의 보도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일본의 '가장 기묘한 부분'을 보는 것 같습니다. 똑같이 입헌군주제를 택하고 있는 영국에서는 왕실 인사들의 사생활이 황색 언론을 통해 낱낱이 중계되고 온갖 치부가 드러나 군주제 폐지론까지 나오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어떤 '눈에 띄는' 움직임을 찾아보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황실을 경애의 눈빛으로 보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문화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인들의 역사적 책임의식이 희박한 것은 2차 대전 뒤 천황이 처형 또는 폐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하고, 비판적 철학자로 유명한 후지타 쇼죠는 "심지어 태평양전쟁 전의 엄혹한 시기에조차 교사들은 겉으로는 천황제일을 외치면서 뒤에서는 우스개 소리를 하기 일쑤였다"고 냉소합니다.
지난달 도쿄 요요기의 메이지신궁(神宮)에 갔다가, 검은 리무진을 타고 지나가는 마루히토 황태자 일행의 행렬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경찰이 시민들의 통행을 막고 있는 동안 외국인들만이 황태자 행렬을 신기한 눈으로 지켜봤을 뿐, 눈여겨보는 일본인들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메이지 시절 스러져가는 도쿠가와 막부를 지키기 위해 천황에 맞서 싸웠던 낭인 조직 '신센구미(新選組)'가 드라마로 만들어져 올들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고요.
일본 황실이 울트라 군국주의의 정점이 되었던 시기도 분명 있었지만, 지금 일본 언론들의 황실에 대한 관심은 '감춰진 것' '감춰야만 했던 것'을 슬금슬금 건드려보는 가벼운 상업주의, 혹은 알맹이도 없는 사생활 파고들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아들 못 낳는 며느리'로 몇 년째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는 마사코의 사례가 딱 그렇지요. 그닥 자랑스러워하지도 존경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동등한 '한 사람의 인격'으로 대우해주는 것도 아니라면 대체 21세기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 황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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