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이웃동네, 일본

일어는 못하는데 수다 떠는건 상급반

딸기21 2004. 4. 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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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나라 언어를 배운다는건 정말 힘든 일이다...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농인처럼 살고 있다. ㅠ.ㅠ
매주 화요일은 내가 일어공부를 하는 날이다. 꼼양이 월~수 놀이방에 가기 때문에 월요일과 수요일에도 공부를 할 수는 있다. 월요일과 수요일은 한두시간씩 책 보고 혼자 공부하고, 화요일에는 회화 두 탕을 뛴다. 오전에는 한시간 반동안 집에서 가까운 쿠가하라라는 곳의 일본어써클에서 공부를 한다. 그리고 오후에는 집 근처에 있는 코알라마을의 자원봉사 선생님인 시마다 아사코씨가 와서 한시간 정도 일어를 가르쳐준다.
지난주에는 일본어써클에서 소풍을 갔었다. 이번주에는 이름모를 어떤 선생님께서 초급반을 맡았다. 자원봉사 선생님들이라서 몇분이 돌아가면서 가르치는데, 이번주 선생님이 아주 재밌었다. 초급반에는 나하고, 베트남에서 온 호아이 두 명이 배운다. 둘다 일어는 졸라 못하는데... 수다 떠는건 상급반이다 ^^;;

지난시간에 연습한 것은 물건 주문하는 것과, 택시기사에게 길 알려주는 것. 둘다 일본에 온지 얼마 안 된데다가, 호아이는 발음조차 베트남 발음이라서 나같은 쌩초보가 알아듣기에는 아주 꽝이지만 열심히~ 열심히~ 아주아주 천천히 회화실습을 했다.

선생님: 이치고상(딸기)이 백화점 손님을 하고, 호아이상이 점원입니다.
이치고: 이 침대를 사고 싶습니다. 얼마입니까?
호아이: 30만엔입니다.
이치고: 집에까지 배달해주십시오.
호아이: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를 말씀해주십시오.
이치고: 이치고입니다. 오오타구 치도리초 1초메 14-12, 3090-2904 입니다.
호아이: (열심히 적고 있음)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해주세요
이치고: 오오타구 치도리초 1초메 14-12, 3090-2904 입니다.
호아이: (계속 적고 있음)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해주세요
이치고: 오오타구 치도리초 1초메 14-12, 3090-2904 입니다.
호아이: (계속 적고 있음 -_-)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해주세요
이치고: 오오타구 치도리초 1초메 14-12, 3090-2904 입니다.
선생님: 우하하하하하하 
호아이: 6일에 배달하겠습니다.
선생님: 백화점은 배달하는데 일주일쯤 걸려요~
호아이: 14일에 배달해드리겠습니다.
이치고: 오후 3시까지 배달해주십시오.

선생님: 이번에는 호아이상이 손님, 이치고상이 가게주인입니다.
호아이: 샌드위치 3개, 샐러드 4개, 초코렛 5박스 주십시오.
이치고: 1500엔입니다.
선생님: 오호호호 정말 싸군요. 나도 그 가게에서 사야겠네요. ㅋㅋㅋ
이치고: 히히히.
호아이: 집으로 배달해주십시오.
이치고: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십시오.
호아이: 호아이입니다. 도쿄도 오오타구 오오타미나미 1초메 20-10. 전화번호는 ++++++++ 입니다.
이치고: (받아적는다): 다시 한번 말씀해주십시오. 
호아이: 도쿄도 오오타구 오오타미나미 1초메 20-10. 전화번호는 ++++++++ 입니다.
이치고: (계속 받아적는다): 다시 한번 말씀해주십시오. 
호아이: 도쿄도 오오타구 오오타미나미 1초메 20-10. 전화번호는 ++++++++ 입니다.
이치고: (역시 계속 받아적는다): 다시 한번 말씀해주십시오. 
호아이: 도쿄도 오오타구 오오타미나미 1초메 20-10. 전화번호는 ++++++++ 입니다.
선생님: -_-
이치고: 10일까지 배달해드리겠습니다.
호아이: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호아이상, 몇시까지 배달해줄 건지 말해줘야죠
호아이: 오후 5시까지 배달해주십시오~

선생님: 자, 이번에는 택시기사와 손님이 되는 겁니다.
호아이: 곧장 가서...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아주십시오
선생님: 호아이상, 어느 모퉁이입니까? 다음 모퉁이라고 말해주세요
호아이: 곧장 가서 다음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아주십시오.
이치고: 다음 모퉁이에서 왼쪽으로입니까.
호아이: 그렇습니다... 다음 신호에서...오른쪽으로... 돌아서...
이치고: (조용~)
호아이: (더듬더듬) 앞으로... 곧장... 가서...은행... 앞에... 세워주십시오
선생님: 택시는 이미 붕~하고 달려가고 있는데... 요금 많이 나오겠군요 ^^;;

보통 이렇게 되는데... 지지난주에는 선생님이 뭘 가르쳐주려고 하면 호아이상과 내가 속닥속닥(선생님 바로 앞에서 ^^;;) 수다를 떨어서 수업이 좀 늦어지기도 했다. 다름아니라, 호아이상이 나한테 어디서 파마를 했냐고... 나는 서울에서 하고 왔다고 했다. 둘이서 도쿄의 파마 가격이 비싸다는 이야기를 몇분간 수다를 떨면서~

이번주에는 도쿄 시내의 대학교 얘기를 하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외국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호아이는 앞서 말한대로 베트남 사람이다. 베트남에서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영어를 배우는데, 대학교에서는 수업이 대부분 영어로 진행된단다. 
호아이: 영어를 읽을 수는 있지만 말하지는 못합니다.
이치고: 저도 그렇습니다.
선생님: 저도 그렇습니다. 
셋이 다같이: 와하하하하~~
호아이: 불어를 배웠지만 말할줄 모릅니다.
이치고: 저도 고등학교 때 불어를 3년 동안 배웠지만 일이삼사도 모릅니다.
선생님: 으하하하 이해합니다.

호아이네 엄마는 불어를 할 줄 안다고 했다. 그러나 호아이의 언니는 러시아어를 공부했고, 지금은 열살난 아이에게 과외수업으로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호아이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지금은 남편을 따라 일본에 와서 일어를 배우고 있다. 호아이는 노트에 가로줄을 긋고, 가운데에 1975라는 숫자를 쓰고, 숫자를 기준으로 세로선을 그었다. 그 시기에 프랑스에서 러시아어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나는 한국이 일본 식민지였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일본어를 할 줄 알지만 엄마는 못한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지만 못 한다고. ^^;; 언어는 결국 역사로 귀결된다. 

수업은 참 재밌었다. 끝나고 나오는길에 선생님이 "이치고상은 재밌네요"라고 하길래 나는 "선생님도 재밌어요" 하고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