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만명이 버스요금을 올린 데 항의하며 거리로 나서자, 브라질 정부는 시위대를 다독이며 19일 요금을 원상복구했습니다. 하지만 시위는 더 격화됐고 곳곳에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터키 이스탄불의 시위는 어찌 보면 예상됐던 일이었습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부가 너무 오만하게, 자기 지지층만 믿고 기본적인 민주주의 원리들을 무시하곤 해왔으니까요.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브라질의 시위 소식에는 좀 놀랐습니다. 룰라 이후 브라질은 정말 '잘 나가고' 있었으니까요. 저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이 점을 궁금하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어제오늘 외신들을 보니 분석이 많이 나오네요.
A protestor shouts during an anti-government protest in Rio de Janeiro's sister city, Niteroi, Brazil, Wednesday evening, June 19, 2013. (AP Photo/Nicolas Tanner)
브라질에서 룰라 다 실바의 노동자당(PT) 정권이 들어선 것은 2003년. 벌써 10년이 지났고, 그 사이 지우마 호세프 현 대통령이 정권을 이어받았습니다. 이 기간 브라질에서 시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2주째 계속되고 있는 시위는 브라질에서 그간 일어났던 ‘토지없는 농민운동’과 같은 반빈곤 시위와는 주체나 방식에서 뚜렷이 구분됩니다. 노동자당을 당혹스럽게 만든 이번 시위는, 역설적이지만 노동자당 집권 이후의 경제성장 덕에 형성된 신흥 중산층이 국가의 ‘진화’를 요구하며 전면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호세프 대통령이 “시위대의 의견을 듣고 있다”며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데 이어 19일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시 당국은 대중교통요금 인상계획을 철회했습니다. 하지만 이날도 시위는 계속됐습니다. 이번 시위는 1990년대 초반 부패의 상징이던 페르난두 콜로르 대통령 탄핵시위 이래 20여년만에 최대 규모입니다.
‘월드컵 전초전’으로 불리는 컨페더레이션스컵 축구대회 브라질팀 경기가 열리던 포르탈레자에서는 유독 격렬한 시위가 벌어져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했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월드컵을 망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놨지만, 시민들은 대형 이벤트에만 관심을 쏟는 정부에 분노를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축구의 나라인 브라질에서, 정부의 월드컵 바람몰이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가 이렇게 크게 터져나올 줄이야...
노동자당의 10년 집권기간 동안 브라질은 실질적인 민주화와 경제성장, 생활개선을 이뤘습니다. 국제적 위상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고, 월드컵과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습니다. 다만 성장세는 둔화됐습니다. 2010년 7.5%였던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1%로 떨어졌고, 올해에도 3%를 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실업률은 역대 최저로 사실상 완전고용에 가깝고(이 중 상당부분은 건설분야 월드컵 특수 때문이어서 월드컵 끝나면 사그러질 것이라는 관측도;;), 임금 역시 계속해서 오르고 있습니다.
In this photo taken Monday, June 17, 2013, a demonstrator holds a Brazilian flag in front of a burning barricade during a protest in Rio de Janeiro, Brazil. (AP Photo/Felipe Dana)
이런 상황에서 버스요금이라는 ‘사소한 요구’를 놓고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난 것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중산층의 절규”라고 분석합니다.
지난 10년 새 브라질에서는 4000만명이 새로 중산층에 편입됐습니다. 하지만 정치·경제·사회시스템은 여전히 낙후돼 있습니다. 특히 공공서비스는 부패와 비효율과 무능의 극치이며, 빈부차이도 여전합니다.
사람들이 버스요금 인상에 그토록 성난 것은, 버스요금을 올렸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요금을 올려도 교통시스템이 개선될 전망이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상파울루에서 가족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는 사회학자 마리아 에두아르다 카르발류는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부패와 치안부재, 시민권 미흡 등이 모두 얽힌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더 잘 살게 된 사람들은 이전처럼 어리석은 채로 남아있지 않는다”며 “앞서 칠레 등지에서도 신흥 중산층이 정부·기업의 횡포에 눈뜨면서 정치적 반발에 나선 전례가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번 시위대의 또 다른 특징은 집권 노동자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반감을 보이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내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돼온 페르난두 하다드 상파울루 시장이 정치적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노동자당 지지는 여전히 굳건한 듯합니다. 호세프 대통령에 대해 최근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87%가 “평균 이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런데도 여론조사기관 다타풀랴의 18일 조사에서 시위대의 대부분이 “지지 정당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번 시위는 노동자당을 넘어 국가시스템 전체에 대한 불만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현지언론인 리우타임스는 대형 이벤트들에 가려진 경제의 정체 조짐에 서민·중산층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내년 대선을 앞둔 노동자당은 당초 버스요금문제로 사안을 국한시키려 했으나, 차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세프의 보좌관 지우베르투 카르발류는 상원에서 “문제가 복잡하다는 걸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타임은 “호세프는 영리한 정치인이며, 터키나 베네수엘라처럼 정치소요 때문에 경제가 휘청이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하지만 룰라의 ‘화려한 시절’ 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던 부패 등의 뒤처리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호세프 정부가 최대 지지기반인 신흥 중산층에게 당장 해줄 수 있는 것은 기껏 버스요금을 다시 내리는 것 정도인 듯합니다. 아직까지는 무슨무슨 위원회를 만든다거나 정책을 내놓는다거나 하는 '약속'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치컨설팅회사 유라시아그룹의 후앙 아우구스토 데 카스트로는 “호세프와 정치권에는 앞으로 힘겨운 몇년이 될 것”이라며고 내다봤습니다.
이번 시위를 글로벌한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영국 BBC방송 경제에디터 폴 메이슨은 터키 이스탄불 시위와 브라질 시위, 더 거슬러 올라가 2011년 아랍의 봄과 그 이전 유럽의 긴축 반대시위 등이 모두 젊은이들의 주도로 일어났다는 데 주목합니다. 기존 미디어와 주류 정치세력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자신들만의 의제를 좇는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죠. 그는 전세계적인 저항의 ‘수평적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실제 다타풀랴 조사에서 상파울루 시위 참가자의 81%가 시위 소식을 “페이스북에서 접했다”고 답했습니다. 물 위에 뜬 섬들처럼 제각각 계기는 다르지만 물 밑에선 이어져 있는 지구적인 저항의 흐름이, 신흥경제대국으로 파도를 피해왔던 브라질에서도 이제 나타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딸기가 보는 세상 > 아메리카vs아메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군 2인자'가 기밀 누설자? 제임스 카트라이트 전 합참차장 조사 파문 (1) | 2013.06.28 |
---|---|
브라질 시위, 그리고 지우마 호세프라는 사람 (0) | 2013.06.23 |
“오바마 ‘핵 없는 세상’ 약속 지켜 달라” 할리우드 배우들, 동영상 편지로 호소 (0) | 2013.06.17 |
오바마 가족 아프리카 일주일 순방에 1000억 (0) | 2013.06.15 |
에드워드 스노든, 부즈 앨런 그리고 '안보의 민영화' (0) | 2013.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