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시리아 화학무기 사용 의혹이 나오자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판세를 뒤바꿀 변수라는 얘기다. 국제정치에 큰 파장을 가져올 6월 이란 대선에 현 대통령의 대리인과 리버럴들의 대부 격인 전 대통령이 출마를 선언했더니, 외신들이 “게임 체인징 후보들”이라고 평했다. 며칠 전 치러진 파키스탄 총선에서 ‘반미’ 노선의 정치인이 승리하자 ‘대테러전의 게임 체인저’라는 기사가 나왔다. 요즘 이 말이 유행인가보다.
우린 국내에서 그보다 더 충격이 큰 게임 체인저를 보고 있다. 며칠 사이에 한국의 모든 뉴스가 윤창중으로 도배되는 것 같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한국의 일간지 1~3면 톱기사 제목에 ‘노팬티’와 ‘알몸’이 줄줄이 등장할 줄이야. 이대로라면 대통령이 미국에 다녀온 사실마저도 깜빡 잊겠다. 윤모라는 사람이 미국에서 여성 인턴직원을 앞에 두고 바바리맨 노릇을 했다는 것만 머릿속에 맴돌 뿐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섹스스캔들 청문회 때의 미국 언론 보도가 생각난다. 청문회 내용이 날마다 언론에 중계되니, 아이들이 “엄마 오럴섹스가 뭔가요” 물어와서 부모들이 당황스럽다고 비꼬는 기사였다. 지금 우리가 그 꼴이다. 국정원 ‘댓글’ 의혹, 남양유업의 횡포, 다 사라지는 것 같다. 윤창중에게 감사할 사람들이 꽤나 많겠다.
윤창중 때문에 창피할 것은 별로 없다. 그는 ‘문화 차이’를 들먹였지만 한국의 문화가 성추행을 용인하는 문화는 아니다. 국격? 클린턴 때문에 미국이 큰 탈 난 것은 없었다. 프랑스도 재작년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스캔들로 망신을 당했지만 개인의 범죄이지 나라의 범죄는 아니었다.
청와대 대변인이 아니라 누가 해도 성추행은 범죄이고, 미국 시민권자가 아닌 국내 여성을 상대로 저질렀어도 또한 범죄다. 윤창중의 변명을 듣자니 이 사회에서 ‘잘 나간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 수준이 엿보여 화가 나는 것은 사실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색누리당’ 패러디 글들을 보면 아주 씁쓸하다. 이런 소동이 어디 한두 번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창중 같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적인 성의식 수준을 대변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여러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을 중요한 자리에 앉힌 대통령의 인식은 안타깝다. 하지만 더 서글픈 것은 ‘여성의 일’이 아직도 폄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윤창중의 ‘가이드’ 발언, 박근혜 대통령의 ‘동포 여학생’ 발언이 딱 그렇다.
대사관 정규직원이든 임시고용된 인턴이든, 일을 하다가 이런 봉변을 당했는데 가해자들은 그걸 인정하기가 그렇게 싫은가보다. 동포이고 여학생인 것이 사실이지 않느냐는 따위의 말장난은 사절이다. 여학생이 학교에서 성추행당한 게 아니라, 인턴 직원이 일을 하다가 위계를 악용한 상급자의 범죄에 피해를 입은 것이다. 그것도 정부 기관에 고용됐던 사람이, 역시 정부 기관에 고용된 사람에게.
문제는 ‘밤문화’나 ‘술문화’ 따위가 아니다. 점점 많은 여성들이 일을 하고 있고, 성범죄의 상당부분은 일터에서 일어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터에서는 거의 상시적, 상습적으로 성희롱이나 성적 모독이나 여성을 상대로 한 언어적·물리적 공격이 벌어진다. 어느 직장이건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여성들이 일하고 있는 모든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
진짜 게임 체인저가 필요하다. 몇 해 전 아메네 바흐라미라는 이란 여성은 황산테러를 저질러 자신의 눈을 멀게 한 남성의 눈을 빼앗는 ‘복수법’을 택했다. 성폭행범은 물리적으로 거세를 해버리고, 성추행범들은 손모가지를 잘라내고, 직장 내 성희롱하는 자들 입에 재갈을 물리면 저질스러운 성의식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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