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아침을 열며] '무살만'을 보며 생각해보는 2012년 신문의 소통법

딸기21 2012. 1. 15.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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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무살만(Musalman)’이라는 신문이 있다. 타밀나두주의 대도시 첸나이에서 매일 오후에 나오는데 분량은 4쪽에 불과하다. 1927년에 창간된 유서 깊은 신문이고, 인도·파키스탄의 주요 언어 중 하나인 우르두(Urdu)어로 발행된다. 초창기 신문을 이끈 무크타르 안사리는 인도국민회의에서 활동하며 영국 식민통치에 맞서 인도 내 무슬림 투쟁을 이끈 저명한 독립투사였다.


‘더 타임스 오브 인디아’가 2008년 무살만을 소개한 적이 있고, 지난해에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또 이 신문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무살만을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다. 그 흔한 웹사이트도 없으니, 신문을 찍어올린 이미지를 인터넷에서 본 것이 전부다. 


이유는 단순하다. 무살만은 ‘손으로 쓰는 신문’이다. 무살만은 컴퓨터 조판으로 만들지 않는다. 활자로 인쇄하지도 않는다. 기사를 ‘카티브’라 불리는 필경사(筆耕士)들이 손으로 쓴다! 위키피디아에는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필사로 생산되는 상업적 신문”이라 쓰여 있다. 


(사실 내가 무살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마하트마 간디의 '큰 재판', 즉 아흐메다바드에서 열린 재판 때 간디가 법정진술에서 영국 총독과 무살만의 인터뷰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찾아보니 무살만은 1927년에 생겼고, 큰 재판은 1922년이었다. 아마도 다른 신문이거나, 아니면 무살만 창간 연도가 잘못돼 있거나 그런 모양이다.)




우르두어를 쓰는 주민들은 대개 무슬림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서예가 중요한 예술장르다. 이슬람에는 오늘날의 이라크에서 탄생한 쿠파체, 북아프리카에서 생겨난 마그리브체, 이베리아 반도에서 유행했던 안달루시아체 등의 여러 서체가 있다. 


무살만의 카티브 3명은 아름다운 우르두어 서체로 신문 제호를 그리고, 인도 곳곳의 통신원들이 보내온 기사를 빼곡히 써넣는다. 팀장 격인 라흐만 후세이니는 1980년부터 30년 넘게 필경사 일을 해왔다. 그렇게 쓰고 그린 신문을 인쇄해 돌린다. 1면 오른쪽 하단은 종종 빈칸이다. 속보가 생기면 써넣기 위해 남겨두기 때문이다.

무살만을 창간한 사이예드 아즈마툴라와 그 뒤를 이은 아들 사이예드 파줄라는 전통 서예로 쓴 신문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2008년 파줄라가 숨진 뒤 가업을 물려받은 3대 사장 사이예드 나사룰라는 취임 직후에 “서예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흔한 대량인쇄 체제로 갈 뜻을 비쳤다. 하지만 최소한 아직까지는 서예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이고, 편지를 읽듯 손글씨로 적힌 신문을 받아보는 독자가 2만명 넘는 규모로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21세기의 뉴스 유통은 찻집이나 술집에서 새 소식을 묻고 전하던 전근대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썼다. 20세기 이전까지는 새로운 소식들이 입에서 입으로, 사람을 통해 전달됐다. 20세기에는 그런 ‘마이크로 커뮤니케이션’이 매스커뮤니케이션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인맥서비스(SNS)를 통해 뉴스가 전달된다. 내 친구, 내 동료가 퍼뜨려준 뉴스를 접하는 것으로 다시 바뀐 셈이다. 21세기의 찻집 역할을 하는 것은 SNS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미디어들은 이런 변화에 맞춰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미디어뿐 아니라 정치인도 기업들도 모두 비슷하다. 누구나 다 소통을 이야기하고, 정보전달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이폰과 갤럭시탭으로 퍼뜨리기 위해 이런저런 실험들을 해본다. 그러려니 피곤한 것도 사실이다. 아직은 세계 어느 나라의 거대 미디어도 변신에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무살만 같은 신문이 아직까지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첸나이 대로변에 위치한 무살만 편집국은 작은 방 한 칸에 벽에 달린 선풍기 2대, 백열등 2개와 형광등 1개가 전부라고 한다. 하지만 유명한 시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종종 이곳을 찾아 대화를 하고 의견을 내놓는다. 무살만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독자들과 체온을 나누고 있는 셈이다. 손글씨 신문을 바라는 일정 규모의 독자가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지 말란 법은 없다.


인터넷에서 만나는 독자들은 영리하고, 또 솔직하다. 거짓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거나 SNS를 신문사에서 일방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면 곧바로 알아차리고 외면한다. 기사의 질을 정확히 판단하고, 널리 퍼뜨려야 할 기사와 무시해야 할 기사, 비난해야 할 기사에 즉시 대응한다. 가짜 소통, 가짜 뉴스는 한눈에 알아본다. 그럼에도 이른바 ‘봇(트위터에서 자동으로 글을 퍼나르는 로봇)’을 돌리고 가짜 전파자들을 만들어 퍼뜨린다는 의혹을 받는 신문도 있지만.

문득 21세기에 미디어가 뉴스 소비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반성을 하게 된다. 미디어가, 경향신문이, 독자들과 소통하는 척만 하면서 뉴미디어·쌍방향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과 흐름을 읽고 전하는 것인데, 뉴미디어니 SNS니 하며 본질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서예로 쓰든 아이패드로 돌리든 중요한 것은 시대와 소통하려는 마음가짐이다. 그런데 마음을 나누는 편지 같은 기사로 다가갈 생각은 않고 어떻게 하면 앱을 만들어 팔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새해가 되어서일까, 무살만의 필경사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살만의 필경사 같은 '마음'이 되겠다는 것이지, 정말로 필경사가 되려는 생각은 없다... 카티브의 급여는, 신문 한 페이지당 60루피, 약 1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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