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프리카의 경제적 중심인 케냐의 대선·총선·지방선거가 4일 시작됐습니다. 우리에겐 멀고 멀게만 느껴지는 나라... 하지만 사실 미국이나 유럽이나 다 비슷한 거리랍니다 ^^ 제게는 마사이 마라 동물관광과 케냐 커피의 추억이 있는 나라이기도 하고요.
이번 선거, 2008년 12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선 유혈사태 이후 5년만의 선거입니다. 동아프리카 주변국들이 모두 분쟁과 무정부상태 등의 혼란에 놓인 상황에서 치러지는 선거라, 아프리카에 이권이 있는 서방 국가들과 기업들은 케냐 총선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일간 데일리네이션 등 현지 언론은 이날 오전 나이로비 시청을 비롯한 곳곳의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줄을 선 가운데 투표가 시작됐다고 보도했습니다. 24년간 장기 집권했던 옛 독재자 다니엘 아랍 모이도 투표소에 모습을 비췄습니다. 세계 최대 슬럼 중 하나인 나이로비 외곽 키베라에서는 새벽 4시부터 유권자들이 모여들어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인도양의 중심 무역항이자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몸바사에서는 투표 개시 몇 시간 전에 무장집단이 매복 공격으로 경찰 5명을 사살하는 등 불안이 계속됐습니다. 선거 보이콧을 주장해온 무장조직 ‘몸바사공화위원회’의 짓으로 보입니다. 독립 기구인 선거감시위원회는 “공정한 선거가 이뤄질 수 있게 하라”며 당국과 야당에 호소했고, 나이로비 중심가의 투표소들은 공격에 대비해 차량으로 바리케이드를 둘러친 뒤에야 문을 열었습니다.
A shop in the Kibera slum in Nairobi is plastered with campaign posters Sunday. /Reuters
므와이 키바키 현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당선됐을 때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면서 케냐 정국은 종족갈등과 유혈충돌로 비화했고, 이전까지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다수 키쿠유족과 소수 부족들 간의 대결양상으로 치달았더랬죠. 당시 키바키 측은 대선에서 최대 경쟁자였던 루오족 출신 라일라 오딩가(69)를 연립정부의 총리로 끌어들이는 타협책을 통해 가까스로 정국을 안정시켰습니다.
키바키가 불출마한 가운데 오딩가는 5년 만에 대권 재도전에 나섰습니다. 최대 라이벌은 케냐 건국영웅인 조모 케냐타 초대 대통령의 아들 우후루 케냐타(73)입니다. 양측은 여러 여론조사에서 각각 35~45% 사이의 지지율을 오가며 각축을 벌이고 있는데, 오딩가 측이 근소하게나마 우세한 양상인 듯합니다. 케냐타는 5년 전 유혈사태 때 학살을 저지른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기소된 인물입니다. 4일의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거나, 과반 득표했더라도 24개 카운티 중 한곳에서라도 25% 미만을 득표했을 경우 1, 2위 후보가 결선투표를 치러야 합니다.
지난번 선거 때 홍역을 치른 케냐는 이번 대선에서 언론의 선거감시와 시민권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개혁했습니다. 전국에서 선거감시단 2만2600명이 자유롭게 활동하게 했으며 그 중 10%는 독립된 외국 기구에서 충원하게 했습니다. 지난달엔 각 후보 진영이 나이로비에서 집회를 열고 “모든 선거분쟁은 법정에서 해결한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케냐 선거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축제가 될 지는 미지수입니다. 케냐 대선 사상 최초로 대선 후보 간 TV 토론까지 벌였으나, 2차 토론 때 케냐타 측이 ICC 기소 건을 의식, 불참하면서 빛이 바랬습니다. 집권 기간 부족 경쟁을 억누르고 통합을 했어야 할 키바키 현대통령은 오히려 부족 세력들의 이합집산에서 밀려 재선에 도전하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고요. 왜 안 나왔나 했더니 또 이런 사정이 있었다고 알자지라 방송이 보도했네요.
3월4일 투표를 하기 위해 줄지어선 마사이족. /AP
케냐 선거가 중요한 것은 동아프리카에서 외부 세계와 통하는 사실상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케냐는 오래전부터 철도가 깔려 서방 세력(당시엔 영국 제국)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돼왔으며, 독립 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대부분 나라들이 내전과 분쟁에 시달릴 때에도 비교적 안정을 구가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랍 모이가 오래 집권하긴 했으나, 대선 유혈사태 이전까지만 해도 독재정권에서 평화롭게 민주정부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5년 전의 혼란을 거친 뒤 국제적 지원과 정치권의 타협을 통해 분열을 극복해가는 중입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이 나이로비에 본부를 두고 있어, 미국(뉴욕)과 스위스(제네바) 외에 유일하게 유엔 기관의 본부를 유치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탄자니아에 있는 세렝게티와 킬리만자로를 관광하러 가는 사람들도 대부분 나이로비에 내려 육로로 탄자니아에 들어갑니다. 그만큼 케냐가 중심이고, 특히나 서방(현지에 있는 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에서 온 주재원이나 국제기구 직원들은 나이로비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한답니다.
케냐가 혼란에 빠지면 관광산업과 일부 광물자원 수출, 교역에 의존하는 동아프리카의 경제는 사실상 붕괴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케냐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커진 것은 주변국들이 모두 불안정에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소말리아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볼모가 됐고 수단은 내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지요. 최근 독립한 남수단은 아직 국가 체제도 정비되지 않았고요. 에티오피아와 지부티와 에리트레아는 어수선하고, 우간다와 탄자니아는 아직 미약하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비디오 메시지를 통해 “부족 간 경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지켜 달라”고 촉구했습니다. 미국 CNN방송은 “케냐가 이번 선거를 평화롭게 치러내느냐에 동아프리카 전체의 안정이 달려있다”고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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