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이스탄불, 술탄의 궁전.

딸기21 2004. 9. 16.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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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가 갑자기 너무 쏟아지듯 올라오면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에 미뤄둘까 했는데, 더 미뤄두면 나리나리처럼 '몇년전 여행기'가 될 것 같아 그냥 올려요. :)

톱카프 사라이. 이스탄불의 구시가지, 유적들이 몰려있는 술탄아흐멧 거리에서 바다(마르마르해)와 면한 곳에 거대한 궁전이 있다. 술레이만 대제 시절을 비롯해, 오스만의 술탄들이 오랜 세월 기거했던 궁전이다. 지금은 성벽 아래에 철길이 지나가고, 해안 안쪽으로 물러나있는 듯 보이지만 예전에는 부지가 굉장히 넓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넓기는 넓다 ^^;;
톱카프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심장'이었고, 지금도 그런 느낌들이 곳곳에서 배어나온다. 건물들을 놓고 보면 블루모스크같은 종교상징물에 비해 그다지 위압적이지는 않지만 안에 있는 유물들은! 한마디로 엄청나다.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 사이의 길을 지나 왼쪽으로 돌면 톱카프 사라이('사라이'는 '궁전'이라는 뜻)의 정문이 나온다. 지금 이 문은 바깥문 정도로 쓰이고 있어서, 안쪽 덜 꾸며진(그래도 이쁜) 정원을 지나야 매표소가 나온다. 입장료가 어찌나 비싼지! 궁전 들어가는데 우리돈으로 12000원 정도 들고, 궁전 안에 있는 트레저리 전시실(보석관)과 하렘은 각각 따로 10000원 정도씩을 더 내고 입장권을 사야만 한다. 아지님과 내 입장료로만 6만원 넘게 들어간 셈인데, 그래도 돈이 아깝지 않았다. 이 정도 유물을 볼 수 있다는데!

가장 환상적이었던 것은 보석관. 세상에나 세상에나... 내가 80몇캐럿짜리 다이아를 어디서 구경하겠냐구... 다이아 뿐만 아니다. 보석 덩어리들!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루비, 에메랄드를 금으로 뭉쳐놓은 듯한 왕관과 옥좌, 촛대, 등불 같은 것들이 네 개의 방에 전시돼 있는데 아쉽게도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어서 찍어오지는 못했다. 
이 보석덩어리들 하나하나에서, 화려함을 넘어선 '제국의 권위'가 그대로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무굴의 샤(왕)가 보내온 의자, 프랑스의 누가 보내온 뭐시기, 이집트의 어디에서 가져온 뭐시기, 중국에서 보내온 뭐시기, 이란에서 가져온 뭐시기... 모두 이런 식이다. 오스만은 진정 대 제국이었구나를 관광객들의 머리에 깊이 각인시켜주고야 마는 유물들.

가이드북에 "톱카프 궁전은 하루 종일 볼 만하다"고 되어있었는데, 진짜로 하루종일 구경했다. 비싼 입장료를 생각하니 밥먹으러 밖에 나갈 수도 없어서, 역시나 비싸기 짝이 없는 궁전 안의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었다. 도뇌르 케밥(샌드위치처럼 빵 사이에 고기를 끼워주는 것) 하나에 7000원, 콜라 캔 하나에 5000원. 날강도가 따로 없었다...

보석관을 나와 카페테리아로 내려가는 길, 보스포러스가 한눈에 내다뵌다. 희디 흰 대리석 건물과 푸른 하늘, 푸른 바다.
술탄의 정원은 소탈한 느낌이 들지만 나무들이 많고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바다에 면한 쪽을 슬쩍 구경하고 다시 올라와서 메인 빌딩 쪽으로 향했다.

술탄의 방문... 화려함의 극치. 촌스럽다 싶을 정도로 화려한 궁전. 심지어 술탄의 방은, 창틀까지 금박으로 덮여 있었다!

술탄의 궁전에서, 호사가들을 가장 즐겁게 했던 소재, 그리고 지금도 모든 관광객들에게 요사스런 호기심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는 곳은 하렘이다. 
하렘의 입구는 푸른 모자이크로 벽과 천정이 장식돼 있는데, 터키의 모자이크 타일은 워낙 유명하다. 이란 쪽의 모자이크가 '진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서도, 하렘의 모자이크도 볼만은 했다.
(하렘의 안뜰에서 바라본 지붕은, 유럽풍으로 보여서 좀 생소했다.)

하렘, 하면 술탄의 난잡한 성생활이라든가 여인들의 암투 같은 것들이 떠오르게 마련이지만, 서구의 소설가들이 지어낸 이미지라는 지적도 많다. 어릴 적, 버트리스 스몰의 '아도라'라는 애정소설을 읽은 적 있다. 

어릴때 읽기엔 좀 야하다 싶은 책이지만 아무튼 그 덕에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는데, 콩가루집안으로 전락한 동로마의 공주가 오스만의 술탄에게 시집을 온다... 늙은 술탄은 죽고, 여인이 된 아도라 공주는 새 술탄 무라드 1세의 여자가 된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아도라공주와 무라드 1세는 물론 실존인물이다. 동로마제국 말기에 술탄의 하렘이 동로마 공주들로 채워졌다는 것도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이고, 오스만의 전성기를 일군 술레이만 대제를 예로 들어보면 의외이다 싶게 일부일처제를 지킨 인물이었다고. 하렘의 여인들 중에 록셀라나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져 25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이 록셀라나라는 여자는 '똑똑하고 야심있는' 인물이어서, 자기 아들을 술탄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었다고도 하지만).

갖고갔던 가이드북에 재미난 대목이 있어서 옮겨본다.


하렘에서의 삶

하렘에서의 일상생활이라고 하면 한바탕 몰아치는 아이들의 야단법석과 어머니들의 경쟁 그리고 괴롭힘을 당하는 노예 등을 떠올리게 된다. 하렘에 출입할 수 있는 남자들은 몇몇 왕자들과 흑인 환관(쉽게 신분을 알 수 있도록 직능에 따라 피부색으로 분리해서 체계화했다) 뿐이었다. 
제국이 부패함에 따라 하렘 단지는 더욱 붐볐다. 1800년대에는 800명이 넘는 첩이 하렘에 기거했을 정도다. 그렇지만 하렘에서는 진정한 로맨스도 꽃피울 수 있었다. 17세기에 술탄 압둘하미드 1세는 정부 중 한명에게 연애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신분으로 보자면 두 사람의 사랑은 절대 어울릴 수 없었다. 
"내 사랑 뤼흐하, 하미드는 당신 것이라오. 이 우주의 창조주는 모든 생물을 창조하셨지. 그렇기에, 신은 아마도 한번 실수를 했다고 벌주시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당신에게 얽매인 노예이니 그대가 바란다면 나를 때려도 좋고 죽인다고 해도 좋소. 영원히 나 자신을 당신에게 맡기오"


술탄의 연애편지치고는, 참 구걸스럽다. 

또 이런 내용도 있다. 어떤 술탄은 여자들한테 흥미가 없었고,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고. 게다가 술탄들의 동성애 취향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는데, 오스만 2세라는 인물의 경우는 하렘에 들어갈 때면 날이 있는 신발을 신어 신경 곤두세우는 소리를 냈단다. 이유는? 여자들이 자기 앞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경고의 표시였다고 하니, 별 희한한 사람도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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