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여행 네째 날. 아침에 모처럼 일찍부터 움직여보자 해서, 60바트 내고 뚝뚝이 타고 카오산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 대리석 사원에 갔습니다. 원래 이름은 왓 벤짜마보핏(Wat Benchamabophit)인데 대충 '대리석 사원(Marble Temple)'이라고 부릅니다.
1899년 출라롱꼰 왕 시절에 이탈리아 대리석을 수입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바로 근처에 두싯(Dusit) 왕궁과 거기 딸린 전시관, 두싯 동물원 등이 몰려 있어요.... 음... '몰려'있다고 하기엔 드넓은 지역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 대리석 사원은 두싯 왕궁 짓고 나서 거기 사는 왕실 일가를 위해 신축된 것이니, 큰 범주로 봐서 하나의 구역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대리석 사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외부를 온통 대리석으로 마감했습니다. 그랜드팰리스 같은 초대형 관광지에 비하면 사람도 적고, 훨씬 조용하고 단아하달까.
이 대리석 사원 자체도 본당 건물과 10여 개의 부속건물들로 이뤄진 제법 큰 단지랍니다.
사진은 없지만... 대리석 사원의 안쪽 ㅁ자형 홀에는 회랑을 따라 태국 곳곳 불상의 레플리카를 전시해놨어요. 한국이나 일본 불상과는 사뭇 다른 태국 불상들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중국, 일본, 인도, 미얀마(버마), 캄보디아 등지에서 온 불상(과 그 복제본)들이 줄지어 있는데 한국 불상은 없더군요... ㅎㅎ 교류가 없었나봅니다.
그런데 사실 대리석 사원에 들렀을 때, 사원보다 더 재미있었던 곳은 스님들이 사시는 동네 구경이었습니다.
사원을 따라 잘 정돈된 시내가 흐릅니다. 다리를 건너면 부속 시설들과 중국 풍의 건물들, 그리고 스님들 사시는 집들이 나옵니다. 안쪽까지 구경할 수는 없었지만 기숙사처럼 된 주거지역을 겉에서나마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답니다. 특유의 사프란 빛깔 장삼을 걸친 스님들이 몇 분 지나다니고, 실내에서는 이제 열댓살 밖에 안 되어 보이는(혹은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데 그쪽 사람 나이 구분 잘 못하는 제 눈에 어리게 보인 것일 수도) 어린 스님들이 웃통 벗어던진 채 창 밖을 보고 있고...
방콕이 관광지 맞아 싶을 정도로 고즈넉한 동네. 나무 그늘에서 요니와 둘이 시원하게 애플쉐이크 한 잔씩 마시고 다시 출발.
대리석 사원에 이어 찾아간 곳은 아난타 사마꼼 홀(Ananta Samakhom Throne Hall)이었습니다. 다소 무덥고 끈끈한 날씨에- 하지만 바람 불거나 구름 끼면 바로 시원해지는 재미난 날씨에, 엄청 넓은 잔디밭을 지나 건물에 도착했습니다.
1906년 출라롱꼰 왕(라마5세)이 두싯 왕궁 지었고, 뒤를 이은 몽꿋 왕(라마6세)이 두싯 왕궁에 딸린 리셉션 홀로 아난타 사마꼼을 지었다고 해요. 하지만 지금은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꼭 옛날 중앙청 보는 것 같아여...
어떤 전시관이냐면... '왕과 왕비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을 전시하는 곳입니다. 처음엔 무언가 문화재들이 들어 있는 박물관이겠지 싶어 들어갔습니다. 입장료가 어른 150밧, 아이 75밧으로 생각보다 싸더군요. 다른 시설들에 비해 좀 싸네, 겉보기엔 위풍당당 있어뵈는 건물인데... 하면서 들어갔지요. 여기는 그냥 긴 바지로도 출입할 수 없고, 남녀 불문 오로지 싸롱을 입어야만 하는 곳이었습니다.
들어가서 본 것들은 엄청나게 많은 이들(수십명~수백명)이 아주 긴 시간(대략 1년~3년)에 걸쳐 무지막지한 에너지를 들여 만든 공예품들이었습니다. 사진촬영 금지여서 사진은 없고요. 태국이 자랑하는 수공예품이랄까요.
나무를 파서 만든 거대한 조각 벽화, 색색의 풍뎅이 등딱지를 떼어내 이어붙인 엄청난 크기의 벽장식, 저걸 대체 왜 만들었을까 싶은 크기의 자수 작품, 나무 파다가 눈알 빠졌겠네 싶은 의자, 금을 쪼개고 구부리고 파내어 만든 무지무지 화려한 모형 배, 너무 아까워서 앉을 수나 있겠어 싶도록 공들여 만든 코끼리 안장, 불교의 이상향을 형상화한 사람 키보다 큰 나무 조각품 등등.
만든 지는 대개 10년이 안 된 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푸미폰 현 국왕과 왕비를 위해 최근에 공들여 제작한 것들이라는 거죠. 푸미폰 국왕 즉위 60년 겸 탄생 80년 기념 목조공예, 시리낏 왕비 환갑 기념 의자,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시리낏 왕비가 운영하는 태국 공예 지원 재단에 소속된 공예가들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태국에서 늘 볼 수 있는 게 왕실 일원의 사진들입니다. 특히 푸미폰 국왕의 사진은 거의 20년, 30년 전의 비교적 젊었던 모습들이죠. 언제까지 국왕의 이름으로 쿠데타를 밀어주고 엘리트 기득권층만의 권력 독점을 추구할 것이며(탁신 친나왓에 이은 잉럭 친나왓의 집권으로 왕실-군부-기득권층의 삼각 결탁관계가 더 이상은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대로 드러났죠), 국왕의 사진으로 국민들을 결집시킬 것인지...
하지만 별다른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역 패권 국가가 될 정도로 땅이 넓거나 인구가 많지도 않은 태국이 관광산업으로 큰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이상, 왕실은 일종의 '상품'으로(혹은 나아가 저런 공예품들이 보여주듯 관광상품을 만들어내는 원천으로) 존재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홀을 둘러본 뒤에는 두싯 동물원에 둘러서 허접함에 좀 실망해주고, 람부뜨리의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돌아보고 왔는데도 오후 2시, 그제야 점심 먹고, 카오산 거리로 나가 요니 레게머리 땋고... 이렇게 나흘 째의 관광은 슬렁~슬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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