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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노우스키, '과학과 인간의 미래'

딸기21 2012. 4. 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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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인간의 미래 A Sense of the Future: Essays in Natural Philosophy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임경순 옮김. 김영사



얼마전 읽은 '루시, 최초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김영사에서 펴낸 '모던&클래식' 시리즈 중의 하나다. 그 시리즈의 '도도의 노래'나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오래된 책이다. 에세이 묶음집인데 처음 나온 것이 1977년. 국내에선 그 20년 뒤인 1997년 임경순 선생 번역으로 이미 한차례 출간됐다가 최근에 출판사와 포장이 바뀌어 다시 나왔다. 한글판에 적힌 저자 이름은 동유럽식의 '브로노프스키'에서 10여년 만에 영어식 '브로노우스키'로 바뀌었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오늘날의 폴란드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독일을 거쳐 영국으로 이주한 과학자다. 책은 '과학'이라는 포괄적인 주제와 그걸 둘러싼 여러가지 논점들에 대해 저자가 남긴 에세이들로 구성돼 있는데, 딱히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오래전 글들인데다가 내가 과학도인 것도 아니고... 


재미있었던 것은 저자가 활동했던 1930년대 과학계의 분위기 같은 것들. 칼 포퍼와 버트란드 러셀, 그들이 과학자들에게 미친 영향, 그런 것들이 재미있었다. 


책의 상당부분은 '과학의 언어와 시의 언어'라는 저자 자신의 관심사에 집중돼 있고, 그 외에 큰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과학자들에 대한 '옹호'라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그것이 목적이자 과정이자 본질이다... 그런데 왜 핵무기를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대? 응? 진리를 추구하면서 사람들을 죽여도 좋아? 더군다나 로스앨러모스에 모인 과학자들, 2차 대전이 한창이었던 그 시기에 원자력의 파괴력을 알았던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괴물을 만들어낼 것임을 알고 있었잖아?


어떻게 옹호할 것인가? 과학철학, 과학과 윤리 쪽에서 말씀 깨나 했다는 저자의 옹호론은 '동어반복'이다. 과학자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그것이 목적이자 과정이자 본질이다... 이 말이 설득력 있을까?


설득력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 '설득력 있다'는 말은 좀 모호하다. 바꿔 말하자. 저자의 주장은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면 무기이고 고기를 썰면 요리도구라는 식의 '중립적인 도구'론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말하는 '진짜 과학자들의 태도'를 과연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얼마나 견지하고 있느냐에 있다. 즉 과학자들 중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지상과제이자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진짜 과학자'들이 얼마나 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려 해도 역시 목구멍에 찌꺼기가 걸린다. 과학자들의 자세나 정신상태가 문제가 아니라, 과학 자체가 과연 중립적이며 진리 탐구적이냐는 것이다. 저자는 '과학은 진리를 찾는 것'이라는 명제에 기대어 과학자들을 옹호한다. 맞는 말씀이라고 본다. 그것이 인류의 발전을 이끌어온 것이라고, 나도 믿는다! 믿자! 


더불어 저자는, 과학자들은 다른 '일반인 집단'보다 더 '국제적인 연대'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그냥 한국인이고 서울시민인 것과 달리 과학자들은 '국제 과학 커뮤니티의 일원들'로서 자기네들 그룹의 정체성을 더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들에게는 조국이 있다'던 파스퇴르의 말(한국에서는 '황우석의 말')은 거짓이란 말씀? 여기에 대한 대답 또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으로 뭉뚱그릴 수밖에 없잖아...


브로노우스키. 사진/위키피디아


브로노우스키는 1908년 태어나서 1974년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각인된 시대는 '나치즘이 세상을 망쳤던 시대', '핵무기가 과학자들을 살인무기 개발로 몰아넣었던 시대'였다. 그래서 그가 주로 경계하는 대상은 '국가권력'이다. 책에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해도 자유롭고자 노력해야 하는 과학자들의 의무를 강조한 글이 실려있다. 


하지만 그가 죽고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국가권력보다 더 강한 '돈의 권력'이 과학을 지배하고 있다. 이 시대에 '과학자들을 위한 변명'을 넘어서서 사람들이 과학 자체를 신뢰할 수 있으려면? 결국은 감시 뿐 아닐까. 과학과 사회의 교류, 과학과 인간의 미래에 대한 '과학자들을 넘어선 모든 이들의 고민과 토론'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별로 재미없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런 류의 고전이 자꾸자꾸 출간되는 것은 반갑다. 책 표지의 '탁월한 통찰과 선구자적 혜안으로 과학의 한계와 맹점을 예리하게 분석, 현대 과학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한 기념비적 저서!'라는 선전문구는 황당하지만 말이다. 이게 뭥미... 지금껏 본 책 광고 문구 중에 촌스럽기로는 1, 2위를 다투겠다... 

말미에, 사회가 '이견'에 눈과 귀를 열고 있어야 하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풀이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저 민주주의 사회이니까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줘야 한다, 정도로만 생각하기엔 사실 '이견에 대한 관용'은 너무나 중요하다. 중요한 이유에 대해 저자는 역시나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사회의 발전은 '진리를 추구하는 길로 사회가 나아가는 것'이므로. 


"이견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는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장치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관용은 수동적인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에 대한 능동적인 존중에서 발전되는 가치다." 

밑줄 쫙.


1930년과 그 뒤 몇 년 동안 영국 과학자들 간의 정치적 분위기는 좌절과 초조 같은 것이었다. 그때 케임브리지 철학자들이 극히 자유로운 양심 기준을 내놓아 제자들을 고무시켰다. 무어 G. E. Moore는 저술과 강의를 통해, 러셀은 평화주의자로서의 확고한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청년들은 철학을 갈망했기 때문에 케임브리지에 있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그들의 새로운 신념을 나타내기에 너무나 거창한 명칭이지만, 오래전에 블레이크가 말한 무신념으로부터의(베이컨, 뉴턴, 로크로부터의) 도피처였다. 그들은 엄청난 사회적 재난에 직면하여 일관된 개인적 행위의 약호를 세워줄 수 있는 어떤 조리 있는 근거를 찾고있었다.

포퍼의 <과학적 발견의 논리>가 출간된 것은 1934년 말경이었다. 그의 주장이 우리 세대에 매력적으로 보였던 이유 중 하나는 그것들이 분명히 단일한 퍼스낼리티의 표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퍼스낼리티는 그 사상과 같이 숨쉬고 논의하고 투쟁했다.

그는 과학을 완성된 계획으로 보지 않았으며 무의식적으로라도 완성되리라 생각할 수 있는 계획으로도 여기지 않았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과학은 체계적인 것이지만 영구히 개방된 체계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되며 해마다 자연의 보다 많은 것을 포함하여 성장한다. 그러나 자연의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이상적 체계의 전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퍼가 내 세대의 과학자들에게 존경받았던 두 번째 이유는 과학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단계에서든 과학이 인간의 행동을 인도해 나갈 유일하고 궁극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가 그에게서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것은 과학에 대한 정열이었다. 그것은 체계로서가 아니라 활동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것이었다. 즉 지식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한 방법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정열이었다.

과학이 반드시 진리에 가치를 부여해야 함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현대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진리는 개인의 가치로서, 과학자 혼자 자기 작업을 할 때 그의 행위의 지침이 된다. 그것이 실제 진리와 갈등을 빚는다면 어떠한 신념도 존속할 수 없다는 가정을 사회 전체가 인정할 때만 그것이 사회적 가치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무언의 가정이다.

나는 과학적인 사회가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당연시한다고 말해왔다. 정치적인 진리든 종교적인 진리든, 궁극적인 진리가 발견되었다고 믿는 사회는 그것을 강요하기만 한다. 그것은 권위주의적인 사회다. 진리가 이미 밝혀졌다고 믿는 사회는 모든 변화를 거부하려 한다.

내가 추출하려는 사회적 가치는 사회가 진화하기 위해 정비하는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가치들은 과학적인 사회에서 진리를 탐구함으로써 발전하는데, 이유는 그 탐구가 사회의 진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며, 진리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는 그 사람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우리가 정신적인 독립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이 독창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을 위한 도구다. 그러나 단지 도구일 뿐인 독창성이 우리 사회의 가치 중 하나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를 진화시키는 데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독립성이나 진리 역시 그 자체로 언제나 미덕일 수는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독창성이 독립성과 마찬가지로 우선적인 사회적 가치, 즉 끊임없는 진리 탐구를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사회의 가치가 되어왔다는 사실이다.

독창성과 독립성은 인간 정신의 특성으로서 사회는 그러한 특성들의 표현에 특별히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것들을 보호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견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견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는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장치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관용은 수동적인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에 대한 능동적인 존중에서 발전되는 가치다. 과학에서는 타인이 자기 나름의 의견을 가질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타인의 의견이 설사 틀렸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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