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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 간만에 재미난 책

딸기21 2006. 10. 1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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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 

클라이브 크리스티 (엮은이) | 노영순 (옮긴이) | 심산 | 2004-09-06



동남아시아 역사에 대한 책을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몇 해 전에 어느 서양 외교관이 쓴 ‘한권에 담은 동남아시아 역사’라는 것 한 권 보고 나서 적당한 교재를 찾지 못한 것도 있고 내 관심사가 아닌 것도 있고 해서 그냥 치워놓고 있다가 이번에 세미나 커리큘럼으로 이 책이 들어간 덕에 읽게 됐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아주아주 훌륭한 책이다!


뭐가 훌륭하냐면, 동남아시아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는 거다. 모헨조다로 앙코르와트 이런 식으로 출발해버리면 그 나름대로 의미는 있겠지만 김이 좀 빠진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20세기에 초점을 맞춰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여러 지역들의 풍경을 전한다. 그냥 풍경화 풍속화로만 그리는 것은 물론 아니다. 20세기가 어떤 시대였나. 우리도 ‘아시아’ 해봐서 아는데, 이 지역 사람들에게 20세기는 쉬운 시절 아니었다. (역사에 ‘쉬운 시절’이 과연 있을까마는) 이 100년 동안 아시아 사람들 참 많이 당하고, 남한테 얻어맞고 빼앗기고 자기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다. 식민지, 투쟁, 독립, 이념대립, 전쟁, 발전, 이런 것들이 100년 동안 이 동네 난리북새통으로 만들고 숱한 사람 괴롭히고 또 영웅도 낳고 했었다.


편저자는 그 모양들을 담은 여러 문헌들을 통해 100년간의 동남아시아를 보여준다. 오늘날의 국가 구분으로 하면 말레이시아(말라야),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타이, 버마, 라오스와 캄보디아, 그리고 싱가포르가 약간 들어간다. 서론은 식민시대 이전 동남아를 내륙부와 해양부로 나눠 아주 간략히 개괄하고, 그 뒤로는 연대순-테마별 단락들이 들어간다.

 

“이 책의 서술 배후에 놓여 있는 첫 번째 질문은 ‘전체로서의 이 지역 근현대 역사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통일성을 어느 정도 논증할 수 있느냐’이다. 일견 동남아시아는 지배적인 민족도,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전식민 시기 국가도, 식민세력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에는 특기할 정도로 공통의 역사적인 경험이 있음을 알 수 있다.”(33쪽)

 

그 공통의 경험은 서구 열강의 식민통치를 겪었다는 것(태국이 예외적으로 독립을 유지하기는 했다), 1940년대 초·중반 일본의 군사점령을 당했다는 것, 2차 대전 후 탈식민화를 경험했다는 것, 곧바로 냉전이라는 구도 속에서 곡절을 겪어야 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2장과 3장은 1990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이 망하고 동남아에 지금 같은 나라들이 생기기 이전까지를 다루는데, 2장에서는 이 지역에서 근대적 민족의식이 어떻게 싹텄는지를 보고 3장에서는 그런 의식이 어떤 정치적인 흐름으로 이어졌는지를 살핀다. 4장은 일본 점령 시기, 5장은 일본의 패배와 항복 뒤 동남아의 ‘혁명’ 시기, 6장은 독립 후 국가세우는 과정, 7장은 독립·정착 과정에서 민족간 협상 갈등 냉전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구체화한다. 8장은 1954~1965년 주로 베트남 전쟁 등 인도차이나 상황과 냉전의 영향, 9장은 좀 어수선하지만 자리잡아가는 동남아시아를, 10장은 마무리 격으로 발전해가는 동남아시아를 다룬다.


저자는 우선 저런 테마별로 간단히 설명하고 관련된 문헌들의 요약본을 소개한다. 테마들은 하나같이 재밌다. 프랑스 통치에 대한 베트남의 대응/동남아시아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에 미친 ML 영향/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공산주의자 반란들/제2차 세계대전 중 타이와 일본/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새로운 역할/버마의 군사혁명/세계도시 싱가포르 등등. 하나하나 테마들이 모두 책 한권씩은 읽었으면 좋겠는, 의문 들고 관심 가는 것들이다. 


시간대별로 필요한 지역들을 이리저리 교차시켜서 뽑아놓은 문헌들도 종류가 다양하다. 버마 사야산 반란을 다룬 글은 서양 사람이 관찰한 당시 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베트남에서 ML 영향은 호치민의 ‘민족과 식민 문제에 관한 테제’를 직접 인용해놨다. 미국 국무부 백서, 키신저의 글 같은 것들이 고루 들어가 있어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사건들을 볼 수 있게 했다.

 

“20세기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이념적 차원이 가끔은 부당하게 과소평가되어 왔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이데올로기는 이 지역의 역사가 전개되는 각기 다른 단계에서 주요한 정치적인 세력들과 개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과 우선적인 가치를 형성하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안내자 역할을 했다.”(35쪽) 


이 책에 묶여있는 글들은 편저자가 중시하고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나 그들이나 같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따라 굴러왔다는 점이다. 동북아와 동남아 서로 좀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적어도 20세기에 두 지역 대부분 나라들은 식민지-투쟁-독립-전쟁-발전 같은 겹치는 경로들을 밟았다. 어떤 부분에서 동남아 어떤 지역들은 조선보다 역동적이었고 한국보다 힘이 있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무기력하고 한심했다. 책 읽는 내내 조각난 퍼즐들을 맞추는 듯한 느낌이었다. 깨진 거울로 내 모습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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