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가라타니 고진, '일본정신의 기원'

딸기21 2004. 3. 10. 10:17
728x90

일본정신의 기원 日本精神分析 (2002)
가라타니 고진 (지은이) | 송태욱 (옮긴이) | 이매진 | 2003-08-01



가라타니 고진의 책은 재미있다. 특유의 진지하면서도 경쾌한 느낌마저 주는 필치랄까. 고진의 글은 술술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서평을 쓰기가 힘든 것이 고진의 책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고진의 글에 상당히 반해있으면서도 뭐라 평가하기가 참 힘들다. 그저 재미있다,고 말할 밖에는.


이 책은 내가 올들어 읽은 첫번째 책이다. 때마침 나는 일본으로 건너오게 됐고, 뭐든 일본에 대한 책을 붙잡고 공부를 해야할 것만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라타니 고진, 그리고 '일본 정신의 기원'. 이 책만큼 어울리는 것이 어디있겠나 싶어 책을 펼쳐들었다. 책의 전반부는 제목 그대로 일본 정신의 기원을 논하는 것이어서 재미있었고, 뒷부분은 일본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충분히 해당될,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와 대안을 언급한 것이어서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고진은 우선 보편적인 의미(서구적인 의미)의 '근대성'의 개념과 언어와의 관계를 살피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이 시도했던 식민지 동화계획을 되돌아본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개념을 원용해 고진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기획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뒤이어 고진은 본격적인 '일본 정신' 분석으로 들어간다. 


(일본정신의 기원? 글쎄, '기원'이라는 말은 여러가지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메이지 유신을 거쳐 성장하고 군국주의로 귀결된 일본의 근대가 어디에 기원하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같기도 하고, '고래로부터 전해오는 일본의 정신'을 묻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된 문제가 아니겠지만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고진도 깊이 언급하고 있지 않으므로 넘어가자)

고진은 '일본정신'은 바로 '변용의 정신'이라고 진단하면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신들의 미소'를 꺼내보인다. 일본의 혼령이 서양의 전도사에게 말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는 이 소설은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종교관을 다루는 것을 넘어, '일본에 오면 모든 것이 일본화되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고진은 아쿠타가와의 말을 받아들여, 외래적인 것이 일본으로 넘어와 일본화될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일본의 힘을 설명한다. 한자와 가나의 병용에서 보이듯 외래문화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해 외래적인 것과 일본적인 것이 공존하게 하고, 또한 상호 변화하게 만드는 힘. 이것이 일본만의 힘이냐고?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문화란 언제나 흐르고, 상호작용하게 마련이므로. 하지만 조선과 비교해보면, 일본 문화가 갖고 있던 '변용의 힘'이 더 컸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자와 가나의 병용을 놓고 일본문화의 '변용적 특성'을 설명하는 것은 고진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고, 일본정신을 논한 다른 저술들에서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정작 책이 재미있어지는 것은 책의 타이틀을 좀 벗어난 듯한 주제, 즉 '투표라는 형식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점검하고 있는 책의 후반부다. 

아쿠타가와의 소설을 통해 일본정신의 일단을 보여줬듯, 이 장에서 고진은 또다른 단편소설(기쿠치 칸의 '투표')을 통해 '대의제'의 한계를 논한다. 맑스와 칸트를 좋아하는 고진은 이 책에서도 여러가지 철학적 개념들을 들어 민주주의의 한계를 말하지만 논지는 명확하다. 개인이 다른 개인을 진정으로 '대표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며,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대의제 민주주의/형식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는 것은 고진에게는 철학적/윤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뒤이어 고진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대안으로서 시민운동의 형태를 띈 참여민주주의의 방안(예를들면 시민통화 개념이라든가)을 모색하는데 이 부분은 발상은 재밌지만 다소 나이브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이 책은 지극히 '가라타니 고진的인' 책임에는 틀림없다. 책 말미에는 고진이 언급한 단편소설들 전문이 나와 있어 또한 재밌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