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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따 쇼오조오,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딸기21 2004. 6. 1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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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후지따 쇼오조오 (지은이) | 이홍락 (옮긴이) | 창비(창작과비평사)


리뷰를 쓰려고 마음먹은지는 오래됐다.  ‘서평’이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나를 위한’ 독후감이다. 이 책을 읽고서 내가 나에게, 아무 말 없이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반드시 독후감을 정리를 해야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리뷰를 쓰기가 참 힘들었다. 이 책, 몇마디 말로 정리해버릴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니다.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었다. 알라딘에 올라와 있는 리뷰 3편, 별이 열다섯개. 거기에 지금 내가 별 다섯개를 더 붙이고 있다. 몇편 안 되는 리뷰이지만 이렇게 일관되게 ‘별 다섯개’를 받을 수 있는 책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더우기 재미난 소설책도 아니고, 뭔가 대중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킬 요소 따위란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책.

제목부터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이라니, 이 얼마나 무거운가. 게다가 저자 후지따 쇼오조오는 일본에서는 ‘마지막 철학자’(모든 철학자가 사라진 뒤에까지도 그는 ‘생각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이다)라 불린다지만, 자기네 나라에서도 ‘대중성’과는 아마 거리가 먼 인물일 것이다. 이 사람, 군국주의의 망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본에서, ‘철학’ 따위는 멀찌감치 내던져버린 경박한 세상에서, 상품문화에 모두가 일로매진하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단코 ‘주류’ 같은 것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책은 에세이집 비슷하게 되어 있다. 후지따는 길지 않은 에세이들에서 군국주의 문제라든가 자본주의, 환경에 대한 생각 같은 것들을 들려준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말이 결코 아무한테나 아무렇게나 붙일 수 있는 상투적인 찬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의 글은 한 사람이 ‘전체주의’로 가득찬 이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기 위해 얼마나 모질고 힘든 철학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철학’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름을 줄줄이 불러대는 식의, 요새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종류의 ‘철학공부’하고는 전혀 다르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더 깊이 생각해보고, 숨겨진 것들을 한번 더 생각하고, 숨겨진 것을 들춰내고, 그리하여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그의 ‘철학’이다. ‘전체주의’라는 시대를 경험하는 지식인으로서, 아니 굳이 ‘지식인’이라 할 것없이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은 세상/지구에 대한 ‘의무’라고 후지따는 말한다.

"요컨대 지금 필요한 것은 생활을 주의깊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중략) 그것을 ‘패러다임’과 같은 새로운 용어로 얼버무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생활을 주의깊게 해나가는 가운데서 자기비판의 구체적인 재료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대체적이고 총론적으로 자기비판을 하는 것보다는 개별적인 자기비판을 쌓아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것을 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계는 어떤가? 아니면 이 책상은? 나왕이로구나. 이것은 새것인 걸로 봐서 필리핀에서 벌채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보르네오 것이리라. 필리핀은 이미 오래전에 벌거숭이가 되어버렸으니까 등등. 이와 같이 주의깊게 살펴보노라면 자기자신의 생활환경이 무엇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환경보호를 말하면서 환경파괴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활을 말이다. 또 세계의 모든 현상 그리고 우리들의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내용을 알 수 있게 된다."


후지따의 글은 거창하지 않지만 머리와 가슴을 찌르고, 목소리는 잔잔하지만 카랑카랑하다. 후지따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땅으로 내려온 느낌이 들었다. 사회과학 책들을 백번 읽은들, 나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리. 나는 이 세상의 어디에 위치하는가. 모든 것에 ‘글로벌’이란 꼬리표가 붙어 있는 이 파괴적인 전체주의의 시대에.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순응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지, 그렇게 우리가 세포 하나하나를 죽이고 있는 동안에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인간과 나무들이 죽어가는지, 죽어간 나무와 인간들이 어떻게 지폐로 쌓여가고 있는지, 도대체 왜 우리가 ‘저항’이라는 말을 입에담아야 하는지, 그런데 그 저항이란 것의 형체는 너무도 무정형적이어서 내 눈에는 도저히 안 보인다는 것을, 결국 살아숨쉬는 정신으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것 밖에, 방법은 없다는 것을.

그것은 생각없이 살아가는데 익숙해진 자에게는 물속에서 숨쉬는 것처럼 힘든 일이겠지만, 그래도 숨을 쉬어야 한다.



[스크랩] 신품문화- 반짝거리는 소여

우리는 지금 엄청난 시대를 살고 있다. 물질과 인간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생활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이제 더이상 ‘호모 파베르’가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은 모두 제품으로서 주어진 것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생활수단은 모두 전화 부스나 가스레인지처럼 하나의 완결된 장치로서 제공되고 있다. 음식물까지도 그 대부분을 반제품 상태로-게다가 그 ‘반’은 우리들에게 소꿈놀이의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계획적으로 ‘반’정도에서 멈춰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한층 더 손이 많이 간 완전한 제품으로서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질’은, 그 근본개념이 완전히 뒤집혀서 자연적 재질과의 연관성을 싸그리 박탈당한 상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의 원질이나 태고의 원형은 그 어떤 작은 조각이나 희미한 흔적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이 ‘물체’는 정상적인 형태로는 더이상 상상력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것은 새삼스레 전생(또는 내세)의 모습을 상기(또는 예감)시키는 희미한 흔적이나 어렴풋한 예조를 깡그리 없애버린 정연한 현재적 형태로서만 존재한다.

상상력이 상상력일 수 있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전생의, 그리고 미래가 아니라 내세의 모습을 교감적으로 떠올릴 수 있음에 있다. 과거의 기억이나 장래의 예측은 그것이 현재로부터의 연속을 계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재 상태로부터의 단절도 비약도 포함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상력이 산출하는 것은, 어제의 것이라도 그것을 전생 즉 태고의 ‘기억’으로서 상기하는 것이며 내일의 것이라도 그것을 내세 즉 피안의 예감으로서 떠올리는 것이다. 거기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과거와는 달리 몰락이라든가 붕괴, 파탄, 발전 등과 같은 질적 단절 즉 역사가 존재하며 예측적 미래와 달리 초월이라든가 비약, 도정 등과 같은 질적 단절 즉 유토피아 혹은 反유토피아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거기에 정보 창고로서의 과거와는 다른 ‘또하나의 현재’가, 그리고 계산 대상인 예측적 장래와는 구별되는, ‘또하나의 현재’가 뚜렷이 생성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완결된 현재형으로서만 존재하는 오늘날의 물체에는 그와 같은 상상력을 작동시킬 여지가 없다. 정말 그럴듯해 보이는 정연한 질서가 그 모든 형태를 덮어싸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오늘날의 상상력은 어쩔 수 없이 ‘물체’의 정상적인 표면 형태를 일부러 비틀어서 보는 각도에서 작동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가지런히 조화된 정면을 갈기갈기 찢어서 보든지 합리적인 형태 혹은 모습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보든지 요컨대 정상적인 물체 표면에 대해 불신의 방향에서 작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현대적 상상력이 계속 상상력으로 남으려 하는 한 변형이나 패러디, 희화, 풍자 ‘오브제’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인간의 상상력까지도 변형시킨 오늘날의 그같은 완제품이나 완결된 장치는 인간 속의 더할 수 없이 유능한 전문적 재능을 결집시켜 고안해낸 ‘합법칙적인 형태’에 의거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제품은 합리성의 물화된 형태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합리성의 물화란 인간의 이성을 제품이 다 흡수해버리는 것에 다름아니다. 물질이 이성을 흡수.병합했을 때 제품이 발생하고 이성을 물품에 몽땅 주입시켰을 때 이성의 완전한 물상화(物象化)로서의 합리화가 관철된다.

지난날 공공기관과 사적 경영 양쪽에서 관료제라는 인간기계가 사회의 기구화와 합리화를 급격히 촉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러한 상황에 대해 ‘이성없는 합리화’라고 외친 것은 에른스트 블로흐였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경향은, 이미 경향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생활분야에서 실현되고 말았다. 여기서는 인간의 이성이 조직규약이라는 형태의 실체가 되어 사회활동 전영역을 관료제화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필수품이 제품이라는 형태의 합리적 물체가 되고 모든 생활영역까지도 콘크리트화가 완료된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 이성이 인간 속에 있을 때에만 유지되는 이성 고유의 제반 특징은 소실된다. 다시 말하면 ‘아직 형태를 취하지 않은’ 풍부함(그것을 원초적 추상성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그것은 탄력적 복원력과 조형적 변형력의 양극에 걸친 확산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의 폭넓음으로 확보된 보편성, 비합리적 감정에 대해서도 통찰을 통해 그것과 양립하며 더 나아가 결합까지도 할 수 있는 관대함 등의 고유한 특징이 지금은 이성 자체로부터 박탈당해 이성은 하나의 고체적인 형태로 특수화되고 그와 같은 콘크리트화를 통해 ‘물적 장치’와 제품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것은 이성의 폐문이며 감금이다. 그리고 폐문.감금된 이성은 이성 고유의 풍부함 가능성 보편성 그리고 관대함을 잃어버렸으니 이제 더이상 이성도 아니다.

...이와 같은 신품화의 세계에서는 그 하나하나가 이 세상에 최초의 것으로 나타나는 생성경험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사들일 수 있도록 이미 주어진 물건으로서, 다시 말하면 반짝반짝하는 소여성(所與性)으로서 우리 앞에 놓여있을 뿐이다. 오늘날 신품문화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근본적인 성격은 실은 이러한 기성성(旣成性)과 소여성인 것이다.

예를들어 문짝을 하나 수선했을 때도 거기서 나타나는 ‘새삼스러운 새로움’ 다시 말해서 갱신 같은 것은 거기엔 없다. 문짝 하나만이 주변과 연결되는 연속으로부터 단절되고 그 연속의 중단으로 ‘인용’되며, 따로 뽑아낸 부분으로의 새로운 삽입이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주위와의 관계를 재형성하는 것일 때 그 새로 정렬된 각 단편들은 변신하게 되고 거기에 나타나는 몽따주 효과는 관계의 갱신이라는 점에서 전혀 새롭다. 그러한 새로움은 완결된 현재형으로서의 신품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품세계에 있는 것은 통째로 갈아넣는 폐기와 구입의 절차 뿐이다.

또 예를 들어 터진 부분을 정교하게 바늘로 기웠을 때 거기서 볼 수 있는 ‘재생’과 ‘부활’의 새로움 또한 신품세계에는 없다. 잇거나 붙여서 깁는 수선이 주위의 다른 부분과의 저항관계를 고려하면서 그것과의 ‘대립을 내포하는 화해’로서 이루어졌을 때 거기서 볼 수 있는 새로움이란 하나의 전체적 구성에서의 새로움이다. 재생이나 부활은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부분적이면서 동시에 관계적 전체의 소생이기도 했다. 그러한 새로움은 고체와 같이 완결된 신품세계에는 없다. 반짝반짝 빛나는 소여는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유통물일 뿐 경험적 행위로서의 새로움은 아닌 것이다.

경험이란 물질과 인간 간의 상호교섭이므로 상대인 물질의 재질이나 형태, 장소적 환경 등의 여하에 따라 이쪽에서 사전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제멋대로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면 인간은 이를 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그럴 경우에는 물질로부터의 저항이나 물질에의 접근에 있어서의 우회 등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즉 ‘매개’를 반드시 경과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은 고안과 설계와 주형에 따라 일방적으로 제작하는 과정과는 전혀 다르다. 일방적 제작은 그 직선성에서 관료제와 닮았고 군사적 처치와 통한다.

이에 대해, 경험의 결정(結晶)은 사물과의 교섭의 개별적인 형태에 따라 생겨나는 일회적 고유성을 어딘가에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상호성의 흔적이며 사회적인 것의 씨앗이다. 무수한 복제 부품을 무수한 직선의 복합적 배선으로 합성하는 오늘날의 신품에는 그러한 상호교섭의 흔적이 없다.

...지금은 완벽한 법칙성을 자랑하는 기성성과 소여성이 신품문화의 형태를 띠고 새로움 속에 스스로의 숙소를 발견하고 그 속에 파고들어 그것의 숨겨진 영혼이 되기에 이르렀다. 과거에는 ‘영혼’이란 진실을 잃어버린 전두엽이 만들어내는 허위의 논리와 기능에 대비되는 정신의 밑바다에 숨어서 작동하는 진실이라고 하는 것의 영위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상상력을 전형(轉形)시키고 이성을 흡수합병한 제품문화의 세계에서는 정신적 진실이었던 영혼조차도 갈 곳을 잃고 신품 속에 묻혀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묻혀버린 허위의 영혼이 바로 기성성과 소여성이다.

그러니까 ‘나우 now’라든가 ‘지금’이라든가 하는 유행어에 휩쓸려서 신품세계를 믿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현대적 상상력이 보여주고 있는 ‘물체 표면에 대한 불신의 각도’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제 얼마 남아있지 않는 상상력의 비약성과 이성의 다의적 넓이 그리고 경험이 상호주체성을 주의깊게 한데 모으고, 그 모은 것들의 한조각 한조각을 ‘이성없는 합리화’에 대해 질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나가려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확실히,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자는 압도적인 ‘합리화’의 압연기에 짓눌려 묵사발이 되어버리는 어리석은 자로 끝날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황무지’는 그 정도로 엄청난 관철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성경험과 재생과 부활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새로움은, 오늘에 대한 회의 속에서 약간은 바보같은 질적 소수파-다시 말하면 정신적인 야당성-를 낳는 과정으로서만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