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Empire
마이클 하트 | 안토니오 네그리 (지은이) | 윤수종 (옮긴이) | 이학사
이탈리아는 좌파의 전통이 강한 나라라고 하지만, 이탈리아 작자들의 책을 읽은 것은 아주아주 오랜만이다. 이탈리아 좌파의 학문적 경향이 어떤지는 전혀 알 수 없고, 안토니오 네그리가 제법 유명한 사람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 이 책을 공동저술한 마이클 하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책은 아주 재미있었다. 저자들은 근대-제국주의-제국주의적 (국가)주권이라는 것과, 탈근대-제국-제국주권이라는 한 쌍의 시대를 구분한다. 전자는 안과 밖, 대립, 위기와 대응 같은 '이분법'이 통용되는 시대였지만 탈근대, 즉 제국의 시기에는 그같은 이분법은 적용되지 않는다.
핵심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밖'이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인민에서 대중으로, 변증법적 대립에서 잡종성의 관리로, 근대 주권의 장소에서 제국의 무장소로, 위기에서 부패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전과 자본 자체의 팽창에서 오는 모순에 대해 자본은 효과적으로 대응한 나머지, 근대의 국경을 넘어버렸다. 오늘날의 제국은 무정형으로 편재하는, 존재다--
저자들이 묘사하고 있는 '제국'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영화 '매트릭스'에 표상된 세계를 생각했다. 인간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매트릭스의 제국은, 네그리의 '제국'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우화가 아닐까 싶다. 스스로 성장하고, 동시에 위기를 만들어내는 제국. '소통'이라는 무정형의 인간행위(새로운 형태의 노동)를 통해 팽창하는 제국.
그렇다면, 이 제국에 맞선 '저항'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좀 옛스런 말투처럼 들리지만, 이들은 공화주의적 원칙을 내세운다. 이 공화주의의 첫번째 층위는 도주, 탈출, 그리고 유목주의다. 안과 밖이 따로 없는데 어디로 도주를? 이들이 말하는 탈주의 개념에는 지리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동시에 포함되며,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온갖 종류의 '삐딱해지기'가 모두 포함된다. 제국의 소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주권국가의 국경을 넘어버리는 일(이동 노동)이라든가, 젠더에 따른 관습적 구분을 벗어던지는 새로운 탈인간화 같은 일.
자본의 전지구화(無장소)에 맞선 21세기 프롤레타리아트의 저항의 형태로 노동의 이동성(無장소)을 제시한 것은 설득력있었다. 비록 현실에서는 쫓겨난 이들의 어쩔수 없는 선택으로 '노동의 이동'이 이뤄지고 있지만, 거기에서 전복의 가능성을 열어보이는 네그리의 '구멍찾기'는 재미있었다. 여기에다가 '탈출'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패셔너블해 보인다. 팽창할대로 팽창한 제국의 생산 메커니즘을 러프하게나마 그려보인 것도 좋았다. 지난 세기 좌파들의 금과옥조였던 변증법을 거부하라고 선언하는 것도 쌈빡해보인다.
그런데! 우리 모두 이민노동자가 될 수는 없잖아. 어디에서? 움직이는 자본의 제국은 '밖으로의 도주'를 허용치 않는데, '무장소의 저항'은 어떻게 이뤄져야 한단 말인가. 허무한 도주를 벗어날 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네그리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에 또다시 허무하다. 어차피 책을 통해 '나의 저항'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길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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