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반지제왕- 골룸을 만나던 날

딸기21 2004. 7. 3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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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제왕, 아주 오랜시간에 걸쳐서 읽고 있다. 이미 10년전쯤에 처음 소설책을 구입한 이래 수차례 '완독'에 실패한 것은 내 게으름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의외로 내겐 이 책이 그닥 흡입력이 없었다. 솔직히 앞부분, 지겨웠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1편은 버섯마을같이 생긴 귀여운 호빗네 마을만 기억나고, 2편은 거의 기억이 안 난다. 3편은 제법 장관이어서 재밌게 봤다. 스펙터클에 압도되기도 했고.


하지만 (반지팬들께는 죄송하지만) 뭐 그렇게 감동적인 영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배우가 없는 영화'라는 점도 맘에 안 들고,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잘 살린것 같지도 않고. 그 영화 만드는데 돈이 꽤 들어갔을 것 같기는 하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어느 순간, 소설가의 '느낌'이 나에게 (소설이라는 매개를 통해) 전해져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고 치자. 실제로 나는 하루키의 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어느 한 작가의 레퍼토리를 그렇게 많이 찾아읽은 케이스가 드물 정도로. 하루키 소설의 탄탄한 구도와 문장력도 좋아하지만, 내가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외로움' 내지는 '상실의 두려움' 같은 것들이다. 
하루키는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떠나버릴까봐 늘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 중에, 불현듯 다가올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내 내면에 있는 막연한 그런 두려움을, 하루키 소설을 통해서 확인한다. 하루키가 느끼는 두려움의 편린들이 고스란히 나한테도 전해져오는 것 같은 기분. 어쩌면 바로 그런 기분 때문에 조금은 두려워하면서 하루키의 소설들을 계속 읽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내게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그런 순간이다. 작가가 느끼는 어떤 감정이 갑자기 내게로 확 밀려들어올 때. 그런 면에서 톨킨이라는 작가는, 그동안 내게 별로 전해준 것이 없었다. 

제법 긴 여행을 앞두고 있다. 이번 여행에 무슨 책을 가져갈까. 반지제왕 2권 뒷부분이 조금 남았는데, 이 책은 종이커버라서 다른 책들보다 훨씬 가볍다. 3권을 가방에 꿍쳐넣고 떠나기 위해 2권 남은 부분을 맹렬하게(그래봤자...이지만) 읽고 있던 차였다. 톨킨은 영국의 고풍스런 윤리에 젖어있는 듯하고, 꽤나 늙고 보수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글 곳곳에서 배어나오는 귀족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냄새는 도대체 맘에 들지가 않는다.


다만 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작가의 감수성 섞인 언어들, 옛이야기에 대한 향수 같은 것들은 맘에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띈 인물은 파라미르. 아라곤은 작가가 완벽하게 설정해놓은 지도자이고, 프로도는 역시나 '설정된' 구도자 혹은 순례자, 간달프는 '설정된' 현자의 냄새를 풍기는 반면에 파라미르에 대한 묘사는 아주 구체적이고 정성스럽다. 어쩌면 톨킨은 파라미르에게 아라곤보다 더한 애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속으로 이런저런 감상들을 궁시렁거리며 읽어나가다가 이런 구절을 만났다.

And so Gollum found them hours later, when he returned, crawling and creeping down the path out of the gloom ahead. Sam sat propped against the stone, his head dropping side-ways and his breathing heavy. In his lap lay Frodo's head, drowned deep in sleep; upon his white forehead lay one of Sam's brown hands, and the other lay softly upon his master's breat. Peace was in both their faces. 

거미귀신이 나오는 동굴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골룸은 프로도와 샘을 거미귀신에게 넘기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돌아오는 길이고, 샘은 프로도에게 골룸을 경계하라는 말을 하다가 잠이 든 참이다. 

Gollum looked at them. A strange expression passed over his lean hungry fage. The gleam faded from his eyes, and they went dim and grey, old and tired. A spasm of pain seemed to twist him, and he turned away, peering back up towards the pass, shaking his head, as if engaged in some interior debate. Then he came back, and slowly putting out a trembling hand, very cautiously he touched Frodo's knee - but almost the touch was a caress. For a fleeting moment, could one of the sleepers have seen him, they would have thought that they beheld an old weary hobbit, shrunken by the years that had carried him far beyond his time, beyond friends and kin, and the fields and streams of youth, an old starved pitiable thing.

저 구절을,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읽으면서 결국은 눈물을 글썽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와버린' 불쌍한 존재에 대한 애도 혹은 그의 외로움에 대한 동정일 수도 있겠지. 기나긴 소설의 3분의2를 읽어오면서 처음으로 작가와 '소통'하고 있다고 느꼈고, 이 구절 때문에 이 소설은 훌륭한 작품이라고 내 마음대로 단정해버렸다. 자아분열된 골룸 안의 갈등은 문법에 맞지 않는 방정맞은 대사들 때문에 별로 와닿지 않았는데 작가는 저런 순간을 예비해놓고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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