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딸기21 2003. 9. 23. 10:22
728x90

아동의 탄생
필립 아리에스. 문지영 옮김. 새물결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역사학과 지리학, 인구학을 전공한 저자 아리에스는 주로 `인간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춰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로 정치에 편중된 왕조사(王朝史)가 아니라 유럽 중세에서 이어져오는 민간의 `숨겨진 역사'를 찾아내는 섬세한 시각 때문에 그의 저서들은 대중들에게 널리 읽힌다. 국내에서도 `사생활의 역사'(새물결) 시리즈가 TV의 독서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야 출간됐지만, 그의 대표작인 `아동의 탄생'이 프랑스에서 출간된 것은 1973년이었다. 미국에서나 유럽에서나 극성스런 부모 세대들이 아이 교육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현상이 보편화되고 어린이에 대한 `신화'들이 기승을 부릴 무렵이었다. 그런 때에 아리에스가 꽤나 두꺼운 이 책(한글판 703쪽)에서 다양한 기록을 들어 내세운 주장은 "아동 개념이 탄생한 것은 최근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불과 300년전만 해도 유럽은 아동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조그만 원숭이같은 장난감으로 보기도 했었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조부모와 부모, 삼촌과 고모들 틈에서 사랑받으며 자라나는 어린이의 모습은 15세기의 도덕론자나 19세기 전통주의 사회학자들의 상상에서나 존재하던 허구에 불과하다고 그는 단언한다.




책은 아리에스의 전공이나 다름없는 주제와 소재들을 망라하고 있다. 중세 프랑스의 전통사회, `아동'이라는 개념의 발전과정, 근대 이후 교육제도의 변화와 사회상 따위를 다룬다. 아주 학술적으로 쓰인 책이 아니어서 사료를 잔뜩 붙여놨는데도 술술 읽힌다. 저자가 주로 동원한 사료는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학자들의 문헌과 프랑스 혁명 이전 부르주아지들의 서한과 일기 같은 것들이다. 중세의 축제나 아이들 놀이, 의복의 변화도 중요한 사료가 된다.

또 한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중세 이후 그림에 나타난 도상(圖像)들인데, 성화(聖畵) 속 예수 가족의 모습이 17세기 이후에는 어떻게 리얼한 가족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가를 꼼꼼히 들여다본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17세기는 `아동의 발견'에서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발견은 무엇인가. 아동은 성인과 다른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발견, 즉 인식이 트이고 새로운 개념이 생겨난 것을 말한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아동이란 것은 덜 자란 어른, 어서 빨리 기술을 가르쳐 노동력으로 키워야 할 견습생에 불과했다. 도제가 아닌 `학생'으로서 아이를 가르치고 잘 자란 인간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은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아동기-청소년기-성년기-노년기로 이어지는 인생의 시대구분이 뚜렷해지기 시작한 것도, 사람들이 자기 나이를 분명한 숫자로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리 오랜 일은 아니다.

어째서 17세기인가. 부르주아지의 형성, 중산층 의식의 발전, 공개된 대저택에서 은밀한 사적공간으로 바뀐 주거형태의 변화 같은 것들이 가족개념을 새로 만들었다. 엄마와 아이 사이의 친밀함은 그제서야 배타적이고 최우선적인 것이 되었으니, 모성(母性)이라는 감정도 그 전까지는 그렇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간'이 `관계'를 바꾸고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이런 분석은 모성에 대한 현대 페미니스트들의 전위적인 해석과도 일견 통한다.

사회문화적 변화에서 감정과 심리의 변화를 도출해낸다는 점에서 아리에스의 시선은 다분히 유물론적이다. 이런 역사관은 근대 이후 국민국가의 형성과 군대식 학교 체제에 대한 분석이 주를 이루는 책 후반부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수도원의 규율에서 벗어나 잠시 숨통이 트였던 18세기 자유주의적 교육관이 19세기 이후 어떻게 병영식 교육체제로 침몰해버렸는지, 프랑스와 영국의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짚는다.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의 분리를 아동기-청소년기 개념이 갈라지던 시기와 연결시킨 동시에 가난한 하층민과 부르주아지의 교육 분기점으로 지목한 것도 눈길을 끈다.

책은 철저히 프랑스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사실 근대적 교육체계를 외부에서 얻어오다시피 한 우리 입장에서는 남의 얘기처럼 들리기 쉽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제대로 틀을 갖춘 아동 개념도, 교육체제에 대한 역사적 통찰도 없는 채로 시험제도만 들쑤시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교육은 결국 사회문화적 전통과 같이 가는 것이고, 사회 전체에 대한 통찰력 있는 접근 속에서 제도를 다듬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숨겨진 교훈이다.


728x90

'딸기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대 도서관의 역사  (0) 2003.10.14
놀면서 보는 장승업  (0) 2003.10.07
[스크랩] 잔인한 이스라엘  (0) 2003.09.01
[스크랩] 축구, 그 빛과 그림자  (0) 2003.08.29
근본주의의 충돌-지식인의 목소리  (0) 2003.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