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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춘향-오! 일편단심

딸기21 2001. 12. 1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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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

김영랑


큰칼 쓰고 옥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는 옛날 성학사 박팽년이
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단심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설움이 사모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의 외론 혼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 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단심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하단 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 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단심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단심

깊은 겨울밤 비바람은 우루루루
피칠 해 논 옥창살을 들이치는데
옥(獄)죽음한 원귀들이 구석구석에 휙휙 울어
청절 춘향도 혼을 잃고 몸을 버려 버렸다
밤새도록 까무러치고
해 돋을녘 깨어나다
오! 일편단심

믿고 바라고 눈 아프게 보고 싶던 도련님이
죽기 전에 와 주셨다 춘향은 살았구나
쑥대머리 귀신 얼굴 된 춘향이 보고
이도령은 잔인스레 웃었다 저 때문의 정절이 자랑스러워
`우리 집이 팍 망해서 상거지가 되었지야'
틀림없는 도련님 춘향은 원망도 안 했니라
오! 일편단심

모진 춘향이 그 밤 새벽에 또 까무러쳐서는
영 다시 깨어나진 못했었다 두견은 울었건만
도련님 다시 뵈어 한을 풀었으나 살아날 가망은 아주 끊기고
온몸 푸른 맥도 홱 풀려 버렸을 법
출도(出道) 끝에 어사는 춘향의 몸을 거두며 울다
`내 변가(卞哥)보다 잔인 무지하여 춘향을 죽였구나'
오! 일편단심



춘향이 목숨 걸고 정절을 지키는데 이몽룡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혹은 이몽룡이 어사가 되기는 커녕 정말로 패가망신해서 돌아온다면. 그도저도 아니고, 이몽룡이 기껏 '저 때문의 정절이 자랑스러워' 뭐가 중요한줄도 모르는 '잔인무지한' 놈이었다면.

유미주의자. 김영랑은 유미주의자라고, 그렇게 배웠다. 고등학교 때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라는 시가 국어교과서에 실려있었던 것 같다.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당시 정세에는 귀 막은채 감상적인 말들이나 다듬던 시인이라는 식으로 배웠던 것 같은데.
그치만, 저 시, 오! 일편단심 하는 저 <춘향>만큼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처연하고 다소 엽기적이기까지 한 것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런 시는 또 있다. <온몸을 감도는 붉은 핏줄>이라는 것인데, 연정을 노래한 것 치고는 아주 안 낭만적이다.


온몸을 감도는 붉은 핏줄이
꼭 감긴 눈 속에 뭉치어 있네
날랜 소리 한마디 날랜 칼 하나
그 핏줄 딱 끊어 버릴 수 없나


<돌담에...> <오매 단풍들겄네>하는 류의 시와는 사뭇 다른 정서를 담은 시는 또 있다.  


독(毒)을 차고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毒)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毒)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毒)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디!' 독(毒)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디!'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마금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휴....세 치 혀가 사람을 죽인다더니, 시라는 것이 무서울 때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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