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독립언론 반세기 접고 '좌파 컨소시엄' 대주주로 맞은 르몽드

딸기21 2010. 6. 29. 21:01
728x90
극심한 경영위기에 몰렸던 프랑스의 대표적인 신문 르몽드가 28일 좌파 성향 기업인들로 이뤄진 컨소시엄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게 됐습니다. 독립언론 르몽드의 신화는 반세기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르몽드는 28일 경영감독위원회 회의를 열어 라자르 투자은행 최고경영자 마티외 피가스, 이브생로랑 패션하우스 창업주인 피에르 베르제, 인터넷사업가 자비에 니엘로 구성된 컨소시엄을 대주주로 맞기로 결정했습니다.
 

프랑스텔레콤의 자회사 오랑주, 프랑스의 미디어그룹인 누벨 옵세르바퇴르, 스페인 미디어그룹 프리사도 르몽드에 눈독을 들였으나 르몽드의 주주인 기자들과 임직원은 베르제-피가스-니엘 컨소시엄을 택했습니다. 3자 컨소시엄은 르몽드에 1억유로(약 1500억원)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긴급수혈되는 투자자금 대부분은 르몽드의 부채 청산에 쓰일 것으로 보입니다.
 

종이신문의 위기는 세계 공통이지만 프랑스의 경우 특히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르 파리지엥은 신문을 매물로 내놨고, 또다른 일간지 라 트리뷘도 대주주를 물색하고 있습니다. 유럽이 대표적인 좌파 신문 중 하나였던 리베라시옹은 2006년 한 차례 파산 위기를 겪었고, 지금도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고 있지요.
르몽드의 경우 1억유로의 빚을 안고있는데다 자금난이 몹시 심각해, 이번 지분매각 협상이 무산됐더라면 당장 다음달 기자들 월급도 주지 못할 상황이었다고 하네요(제가 지금 이런 일을 남의 일처럼 얘기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긴 합니다만 ㅎㅎ). 전성기 때 80만부였던 발행부수는 30만부 정도로 축소됐다고 합니다.

영국 가디언은 반세기 넘게 기자·사원들을 대주주로 해서 기업이나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을 구가해온 르몽드가 기업인 컨소시엄에 넘어간 사실에 주목하면서, 르몽드의 결정을 그리스 신화에 빗대 ‘파리스의 심판’이라 표현한 사설을 실었습니다(제가 요즘 가디언에 좀 관심을 갖고 있는데 가디언은 '신문의 위기'를 '온-오프라인 통합'으로 넘긴 성공케이스랍니다. 그런 가디언이 르몽드 사태를 보도하는 걸 보니 어쩐지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요).

르몽드는 1944년 12월 창간 이래 프랑스의 대표신문으로 자리해왔지요. 시앙스포(파리정치대학)의 티에리 뒤사르 교수는 “르몽드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공룡이었다”며 “이로써 프랑스 언론의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은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르몽드는 프랑스 저널리즘의 상징같은 존재였다는 점에서 미디어 업계에 던진 파장이 컸습니다. 그런데 매각협상에서 책정된 르몽드의 가격은 신문업계에 또다른 충격을 던져줬습니다. 컨소시엄은 르몽드의 출판·인쇄부문에 6700만유로, 웹사이트에 6300만유로의 값을 매겼다고 합니다.
그럼 신문 가격은 얼마였을까요? 르몽드가 자랑해온 영향력 있는 신문은 겨우 1000만유로로 매겨졌다는 겁니다. 가디언은 “신문의 브랜드 가치에 대한 신화도 이번 매각으로 함께 팔려나갔다”고 지적했습니다.

3자 컨소시엄은 르몽드 신문과 웹사이트를 통합하는 등 회사의 편제를 바꿀 것이라고 밝혔으나, 편집권 독립은 철저히 보장할 것이라 약속했습니다. 르몽드 측도 기존 논조에서 변화가 없을 것임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주주들이 니콜라 사르코지 현 대통령의 정적(政敵)들이라는 점에서 정부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될 것이라 점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재작년 사망한 패션디자이너 이브생로랑의 동성 연인이자 후원자였던 베르제는 2007년 대선 때 사르코지의 라이벌이던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 후보를 후원했습니다.
피가스는 사회당의 2012년 대선 후보가 될 것으로 점쳐지는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가까운 사이이고, 니엘도 사르코지 반대파라고 합니다. 니엘은 정치적으로는 좌파 성향이지만 음란 채팅서비스로 돈을 번 인물입니다. 이 때문에 BBC방송은 “포르노 보스(사장)가 르몽드의 새 주인이 됐다”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언론에 개입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 사르코지는 이달초 에릭 포토리노 르몽드 편집장을 엘리제궁으로 불러놓고 베르제-피가스-니엘 컨소시엄에 반대한다면서 국영기업을 포함한 컨소시엄을 택하라 종용했다고 합니다. 사르코지는 3자 컨소시엄에 지분을 매각할 경우 정부 융자를 중단하겠다는 위협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르몽드 기자들은 대통령의 개입에 격렬히 반발했고, 결국 르몽드 내부 투표에서 3자 컨소시엄이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