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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수페르클라시코. 영어식으로 말하면 ‘수퍼 클래식 더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레알마드리드의 엘 클라시코 더비도 유명하지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1부 리그)의 보카 후니오르스와 리베르 플라테의 경기도 치열하기로는 그 못잖다.
마라도나가 뛰었던 팀으로 유명한 보카는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명문 중의 명문으로 리켈메, 델가도, 테베스 등이 이 팀을 거쳐갔거나 지금도 뛰고 있다. 리베르 또한 에르난 크레스포를 비롯해 아얄라, 사비올라, 캄비아소 등 쟁쟁한 선수들이 거쳐갔던 클럽이다.
두 클럽 모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연고로 하는데, 출발부터 따지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시티처럼 보카는 노동자들의 사랑을 받던 구단, 리베르는 부르주아들이 좋아하는 구단이었다. 지역적으로도 보카는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보카지역에 둥지를 틀고 있고 리베르는 중산층이 밀집한 누녜스에 자리잡고 있다. 아르헨티나 축구팬의 70%는 두 클럽 팬이라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기록 상 최초의 수페르클라시코는 1913년 8월 24일 열려 리베르가 2대1로 이긴 것으로 되어있다. 양팀의 역대 전적은 막상막하다. 아르헨티나축구연맹(AFA) 등에 따르면 올 3월까지 리그경기에서 보카가 68승, 리베르 61승을 거뒀고 무승부로 끝난 경기가 57번이다. 스페인 산탄데르 그룹이 후원하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수페르코파 수드 아메리카나(남미수퍼컵) 등 여러 대회를 종합하면 보카 82승, 리베르 74승, 무승부 71번으로 역시 전적이 비슷하다.
두 팀의 더비가 치열한 만큼 양팀 팬들의 라이벌 의식도 강하다. ‘바라스 브라바스(barras bravas)’라 불리는 아르헨티나 훌리건들의 난동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거기다가 수페르클라시코라는 계기가 겹치면 싸움이 일어나기 일쑤다. 보카 팬들은 상대방을 가이나스(gallinas·닭, 겁쟁이)라 부르며 닭을 끌고나와 놀리곤 한다. 반대로 리베르 팬들은 보카 팬들을 푸에르코스(puercos·돼지, 지저분하다는 뜻)라 공격한다고 한다.
100년 가까이 이어져온 두 팀의 열띤 경기에서 사고가 없었을 리 없다. 68년 6월 23일 통칭 ‘엘 모누멘탈(정식 명칭은 안토니오 베스푸치오 자유 기념 경기장 Estadio Monumental Antonio Vespucio Liberti)’로 불리는 누녜스의 리베르 스타디움에서 더비가 끝난 뒤 관객들이 경기장 12번 출구(Puerta 12·푸에르타 도세)에서 압사당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모두 74명이 죽고 150명의 팬들이 다친, 이른바 ‘푸에르타 도세 참사’였다.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고였다. 희생자 평균연령이 19살이었다고 하니, 대부분의 사망자가 청소년과 젊은 층이었던 셈이다. 문제의 경기는 0:0으로 끝났는데, 종료 뒤 보카 팬들이 위층에서 밑으로 불붙은 종이를 던지자 피하려던 아래층 관중들이 출구로 몰리면서 참사가 벌어졌다고 한다.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는 경기의 특성 탓도 있을 것이고, 많은 지역에서 축구장이 거의 유일한 다중 집결시설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안전기준을 지키지 않고 부실하게 짓거나, 규정보다 많은 인원을 관중으로 들이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아무튼 축구장에서는 유독 대형참사가 잦다.
71년 초 스코틀랜드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는 퇴장하던 관중들이 동점골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기 위해 되돌아가다가 기둥이 무너져 66명이 숨졌다. 3년뒤 이집트 카이로의 자말렉 경기장에서는 담이 무너져 49명이 숨졌다.
82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레닌경기장에서 유럽축구연맹(UEFA)컵 2라운드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 네덜란드 할렘의 경기가 열렸다. 끝무렵 추가골이 터지자 이미 퇴장했다가 함성을 듣고 다시 들어오려는 이들, 나가려는 이들이 미끄러운 계단에 한데 넘어져 참사가 일어났다. 정부 발표로는 66명이 숨졌다지만 실제로는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다.
팬들 난동으로 압사사고가 난 적도 있다. 유명한 벨기에의 ‘헤이셀 사건’이다. 85년 브뤼셀의 헤이셀 경기장에서 잉글랜드의 리버풀과 이탈리아의 유벤투스가 유러피언컵 결승전을 치렀다. 경기는 유벤투스가 1대0으로 이겼는데, 이미 시작도 하기 전 시내에서부터 난동을 부리며 경기장에 몰려든 양팀 팬들이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이 소동으로 경기장이 무너져 39명이 숨지고 454명이 다쳤다. 이 참사 때문에 잉글랜드 클럽들은 유럽대회 출전이 5년간 금지되기도 했다.
88년에는 네팔 카트만두 국립경기장에서 네팔 클럽 자낙푸르와 방글라데시 팀 무크티 조다의 경기 때 천둥번개에 놀란 관중들이 출구로 몰리면서 100명 가까이 숨졌다. 이듬해에는 영국 셰필드의 힐스버러 경기장 FA컵 준결승 리버풀-노팅엄 포리스트 경기 때 벽이 무너져 95명이 숨졌다.
98년 월드컵을 앞두고 96년 10월 과테말라의 마테오 플로레스 경기장에서 열린 과테말라-코스타리카 지역예선에서도 관중이 수용규모보다 많이 들어와 81명이 압사했다. 2001년 가나 수도 아크라에서도 경기장 압사사고로 100명 이상이 숨졌다.
세계 최대의 축구장 참사는 64년 페루에서 일어났다. 그 해 5월 24일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리마 국립경기장에서 페루와 아르헨티나의 예선전이 펼쳐졌다.
아르헨티나가 1대0으로 앞서고 있었는데, 경기종료를 2분 앞두고 페루가 동점골을 넣었다. 하지만 주심은 노골을 선언했다. 관중들이 그라운드에 밀려내려왔고 진압경찰이 뛰어들었다. 아수라장 속에 빠져나가려던 축구팬 318명이 숨졌다. 경기장 담을 무너뜨리고 몰려나간 관중 수만명은 폭도로 변했고, 페루 정부는 이튿날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내린 끝에 한달이 지나서야 리마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마라도나가 뛰었던 팀으로 유명한 보카는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명문 중의 명문으로 리켈메, 델가도, 테베스 등이 이 팀을 거쳐갔거나 지금도 뛰고 있다. 리베르 또한 에르난 크레스포를 비롯해 아얄라, 사비올라, 캄비아소 등 쟁쟁한 선수들이 거쳐갔던 클럽이다.
두 클럽 모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연고로 하는데, 출발부터 따지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시티처럼 보카는 노동자들의 사랑을 받던 구단, 리베르는 부르주아들이 좋아하는 구단이었다. 지역적으로도 보카는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보카지역에 둥지를 틀고 있고 리베르는 중산층이 밀집한 누녜스에 자리잡고 있다. 아르헨티나 축구팬의 70%는 두 클럽 팬이라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기록 상 최초의 수페르클라시코는 1913년 8월 24일 열려 리베르가 2대1로 이긴 것으로 되어있다. 양팀의 역대 전적은 막상막하다. 아르헨티나축구연맹(AFA) 등에 따르면 올 3월까지 리그경기에서 보카가 68승, 리베르 61승을 거뒀고 무승부로 끝난 경기가 57번이다. 스페인 산탄데르 그룹이 후원하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수페르코파 수드 아메리카나(남미수퍼컵) 등 여러 대회를 종합하면 보카 82승, 리베르 74승, 무승부 71번으로 역시 전적이 비슷하다.
두 팀의 더비가 치열한 만큼 양팀 팬들의 라이벌 의식도 강하다. ‘바라스 브라바스(barras bravas)’라 불리는 아르헨티나 훌리건들의 난동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거기다가 수페르클라시코라는 계기가 겹치면 싸움이 일어나기 일쑤다. 보카 팬들은 상대방을 가이나스(gallinas·닭, 겁쟁이)라 부르며 닭을 끌고나와 놀리곤 한다. 반대로 리베르 팬들은 보카 팬들을 푸에르코스(puercos·돼지, 지저분하다는 뜻)라 공격한다고 한다.
리베르 플라테의 홈인 엘 모누멘탈 스타디움
100년 가까이 이어져온 두 팀의 열띤 경기에서 사고가 없었을 리 없다. 68년 6월 23일 통칭 ‘엘 모누멘탈(정식 명칭은 안토니오 베스푸치오 자유 기념 경기장 Estadio Monumental Antonio Vespucio Liberti)’로 불리는 누녜스의 리베르 스타디움에서 더비가 끝난 뒤 관객들이 경기장 12번 출구(Puerta 12·푸에르타 도세)에서 압사당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모두 74명이 죽고 150명의 팬들이 다친, 이른바 ‘푸에르타 도세 참사’였다.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고였다. 희생자 평균연령이 19살이었다고 하니, 대부분의 사망자가 청소년과 젊은 층이었던 셈이다. 문제의 경기는 0:0으로 끝났는데, 종료 뒤 보카 팬들이 위층에서 밑으로 불붙은 종이를 던지자 피하려던 아래층 관중들이 출구로 몰리면서 참사가 벌어졌다고 한다.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는 경기의 특성 탓도 있을 것이고, 많은 지역에서 축구장이 거의 유일한 다중 집결시설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안전기준을 지키지 않고 부실하게 짓거나, 규정보다 많은 인원을 관중으로 들이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아무튼 축구장에서는 유독 대형참사가 잦다.
71년 초 스코틀랜드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는 퇴장하던 관중들이 동점골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기 위해 되돌아가다가 기둥이 무너져 66명이 숨졌다. 3년뒤 이집트 카이로의 자말렉 경기장에서는 담이 무너져 49명이 숨졌다.
82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레닌경기장에서 유럽축구연맹(UEFA)컵 2라운드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 네덜란드 할렘의 경기가 열렸다. 끝무렵 추가골이 터지자 이미 퇴장했다가 함성을 듣고 다시 들어오려는 이들, 나가려는 이들이 미끄러운 계단에 한데 넘어져 참사가 일어났다. 정부 발표로는 66명이 숨졌다지만 실제로는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다.
팬들 난동으로 압사사고가 난 적도 있다. 유명한 벨기에의 ‘헤이셀 사건’이다. 85년 브뤼셀의 헤이셀 경기장에서 잉글랜드의 리버풀과 이탈리아의 유벤투스가 유러피언컵 결승전을 치렀다. 경기는 유벤투스가 1대0으로 이겼는데, 이미 시작도 하기 전 시내에서부터 난동을 부리며 경기장에 몰려든 양팀 팬들이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이 소동으로 경기장이 무너져 39명이 숨지고 454명이 다쳤다. 이 참사 때문에 잉글랜드 클럽들은 유럽대회 출전이 5년간 금지되기도 했다.
88년에는 네팔 카트만두 국립경기장에서 네팔 클럽 자낙푸르와 방글라데시 팀 무크티 조다의 경기 때 천둥번개에 놀란 관중들이 출구로 몰리면서 100명 가까이 숨졌다. 이듬해에는 영국 셰필드의 힐스버러 경기장 FA컵 준결승 리버풀-노팅엄 포리스트 경기 때 벽이 무너져 95명이 숨졌다.
98년 월드컵을 앞두고 96년 10월 과테말라의 마테오 플로레스 경기장에서 열린 과테말라-코스타리카 지역예선에서도 관중이 수용규모보다 많이 들어와 81명이 압사했다. 2001년 가나 수도 아크라에서도 경기장 압사사고로 100명 이상이 숨졌다.
세계 최대의 축구장 참사는 64년 페루에서 일어났다. 그 해 5월 24일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리마 국립경기장에서 페루와 아르헨티나의 예선전이 펼쳐졌다.
아르헨티나가 1대0으로 앞서고 있었는데, 경기종료를 2분 앞두고 페루가 동점골을 넣었다. 하지만 주심은 노골을 선언했다. 관중들이 그라운드에 밀려내려왔고 진압경찰이 뛰어들었다. 아수라장 속에 빠져나가려던 축구팬 318명이 숨졌다. 경기장 담을 무너뜨리고 몰려나간 관중 수만명은 폭도로 변했고, 페루 정부는 이튿날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내린 끝에 한달이 지나서야 리마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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