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어제의 오늘/ 1999년 3월 24일 나토군의 코소보 공습

딸기21 2010. 3. 24.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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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 반도에서도 코소보는 특히 민족적·종교적으로 복잡하다. 코소보는 동쪽과 북쪽으로는 세르비아에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마케도니아, 서쪽으로는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에 면해 있다. 

코소보(Kosovo)는 세르비아어로 ‘검은 새’라는 뜻이다. 1389년 이 곳에 펼쳐진 코소보 폴례, 즉 ‘검은 새들의 들판’에서 오늘날 세르비아인들의 조상들이 막강한 오스만투르크 제국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뒀다. 그래서 세르비아인들은 이 곳을 민족적 성지로 삼고 역사의 중심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알바니아 민족이다. 내전과 공습으로 1999년 190만명이던 인구가 2007년에는 180만명으로 오히려 줄었는데 그 중 알바니아계가 92%이고 세르비아계는 4%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보스니아계와 요란계 소수민족 2%, 터키계 1%, 집시 1% 등이다. 하지만 인구를 놓고도 주장이 제각각 달라, 세르비아계는 자기네 인구가 8%에 이르고 알바니아계는 88%이니 절대다수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코소보는 유고연방 시절인 46년 ‘코소보·메토비아 자치주’로 지정됐다가 74년에는 ‘코소보 자치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90년 옛 유고연방이 해체된 뒤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한 신유고연방이 만들어졌다.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갈라져 나가겠다며 분리독립을 추진하자 세르비아군은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30만명이 학살을 피해 마케도니아 등 주변 나라들로 도망쳤다.

1999년 3월 24일 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은 알바니아계를 보호한다며 코소보를 폭격했다. 나토군이 주권국가를 상대로 공격을 감행한 것은 49년 출범 이래 반세기만에 처음이었다. 

나토 군이 내세운 공식 목표는 “세르비아계를 내보내고, 평화유지군이 들어가고, 난민들을 귀환시킨다(Serbs out, peacekeepers in, refugees back)”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나토군은 먼저 유고의 대공 방어망을 부수려 했다. 이탈리아 내 나토군 기지에서 1000대 이상의 전투기가 발진, 토마호크 크루즈미사일을 코소보에 퍼부었다. 아드리아해의 나토 함정과 잠수함까지 모두 동원됐다. 폭격에 동원된 나토 전투기 비행횟수가 이후 2달 동안 3만8000번에 이르렀다. 하지만 악천후와 오폭, 인구가 밀집한 코소보의 지형적 특징 등으로 인해 숱한 오폭이 벌어졌다. 러시아는 나토의 공습을 ‘명백한 침략’이라 규정하면서 반발했다.

‘학살을 막기 위한 공습’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세르비아 측에서는 나토 공습으로 오히려 민간인 4500명 이상이 희생됐다고 주장한다. 공습 2달 뒤인 6월 25일 공식적으로 무력충돌은 종결됐지만 ‘학살-공습-학살’로 이어진 코소보 공습의 공과는 두고두고 많은 논란을 불렀다. 
2003년 신유고연방은 해체됐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던 나라는 2006년 다시 둘로 갈라졌다. 

세르비아 안에 남아있던 코소보는 2008년 독립을 선언했다. 러시아와 세르비아는 인정치 않고 있지만 미국과 대부분 유럽국들을 비롯해 세계 60여개국이 코소보 독립을 인정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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