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잠보! 아프리카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침략

딸기21 2010. 3. 2.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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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벨기에, 이탈리아는 상대적으로 늦게야 아프리카 대륙에서 역할을 말았다. 가장 먼저 온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대부분 처음 자리 잡았던 해안 지대에 머물렀다.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사람들만이 예외였다. 그들은 모국과의 결속을 끊고 스스로 ‘신에게 받은 권리’를 가진 흰둥이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여겼다.

프랑스가 1881년에 튀니지를 점령하자, 영국은 1년 뒤에 이집트를 집어삼켰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줄루족을 제압하는 동안 프랑스 장교들은 세네갈과 서부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들을 뚫었다. 독일은 마지막에 독일령 서아프리카(오늘날의 나미비아)와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 탄자니아)와 서부 아프리카에 있는 토고와 카메룬을 차지하였다.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령 ‘콩고공화국’을 선포하였다. 
혼란이 점점 더 커지자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84 11월 15일 유럽 13개국 대표들을 베를린의 ‘콩고회의’에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콩고 강 하구에 대한 포르투갈의 요구와 벨기에 왕의 콩고 분지에 대한 식민 정책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여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완전히 나누어 갖는 계획으로 끝을 맺었다.

상대적으로 얼마 안 되는 유럽 사람들이 l억2,000만 인구를 가진 대륙 전체를 폭력으로 장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노예 매매 시절에는 아랍과 아프리카와 유럽의 상인들 사이에 공조 체제가 있었고 수많은 아프리카 지도자들도 잔혹한 이익을 함께 취했던 반면, 이제는 이런 협동작업이 거의 필요 없었다.
유럽 사람들은 1500년 무렵에는 갖지 못했던 두 가지 이점을 확보했다. 1850년부터 의약품 키니네가 나와서 마침내 말라리아를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사망자 수를 80퍼센트나 감소시켰고, 열대 지방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밖에도 새로운 무기들이(예를 들면 1884년 이후에 나타난 기관총 같은) 개발되었다. 이런 무기들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팔지 않기로 1890년 브뤼셀에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합의를 보았다. 수단의 영국 장교들은 한 번의 전투로 1만800명의 아프리카 군을 죽였는데, ‘아군의 손실은 49명뿐’이었다고 열광에 넘쳐 보고하고 있다.

1904년 6월 ‘강경 진압’으로 유명한 독일 군의 로타르 폰 트로타 (Lothar von Trotha) 장군은 병사들을 동원하여 약 8,000명의 남자들과 1만6,000명의 어린이와 여자들이 모여 있는 워터버그 근처의 헤레로 진영을 포위하였다. 살아남은 헤레로족과 나마족 수천 명은 1905년부터 이른바 노동수용소에 감금되었으며,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911년 인구 조사 결과 10만 명 중 7만 5,000명 이상의 헤레로와 나마 사람들이 독일의 종족말살 정책으로 목숨을 잃었음이 밝혀졌다. (나미비아)

문화적으로 보면 아프리카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8억 5.000만 명이 수천의 종족을 이루고 약 1000종의 공인된 언어를 말하며, 50개가 넘는 나라들에 살고 있다. 주민의 40% 이상이 이슬람교이며 50%가 기독교 그리고 나머지 10%가 전통 종교나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
이집트의 역사학도인 파티마(Fatima S.)는 이렇게 말한다. “식민지배는 아프리카를 나누었다기보다 오히려 잔혹하게 통합하였다. 1만 가지의 독립적인 개체들이 합쳐져 50개의 국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영국 인류학자 존 리더(John Reader)는 이를 보충하는 발언을 한다. “외부 세력의 영향 이전 아프리카에 분명히 존재했던 방식, 곧 국가를 이루지 않고 작은 사회로 나뉘어 평화롭게 공존하는 생활방식이야말로 아프리카가 인류 역사에 공헌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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