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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는 아이티와 달랐다

딸기21 2010. 2. 28.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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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대규모 지진 참사가 아직 제대로 수습도 되지 않은 상황인데 칠레에서 또다시 초강력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칠레 지진은 진앙지의 충격만 따지면 아이티 지진의 500~1000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티에서 30만명이 희생된 데 비해, 칠레 사망자 수는 수백명대입니다. 구조작업이 진행되면 사망자 수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이지만 지진 규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습니다.




대도시에서 떨어진 진앙

아이티와 칠레의 차이를 불러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진앙이 위치한 지점을 비롯한 지질학적 차이가 가장 큰 요인이지만 당국의 대비와 철저한 내진설계, 강력한 건축 법규와 체계적인 구호, 정부의 효과적인 대응도 국민들의 생사를 갈랐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면 “칠레는 운이 좋았습니다.” 아이티 지진은 인구가 밀집된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강타했습니다. 진앙은 도심에서 불과 16㎞ 떨어져 있었고, 지표면에서 10㎞ 아래에 있었습니다. 규모 7.0의 강진이 거대한 슬럼이나 다름없던 포르토프랭스를 강타하자 ‘젤리처럼 무너져내린’ 집들에 깔려 어마어마한 피해가 났습니다.

하지만 칠레 지진은 수도 산티아고에서 325㎞나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진앙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 콘셉시온도 115㎞ 떨어져 있습니다. 진앙이 지하 34㎞로 아이티에서보다 깊이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습니다. 지질도 칠레가 아이티보다 더 단단하다고 합니다.

50년 전 대지진의 교훈

남미 최고 부국인 칠레와 세계 최빈국 아이티는 경제력만 놓고 보아도 비교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도시계획과 건축 상태, 긴급구조체계 등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칠레에는 일반인들이 느끼기 힘든 진도 3 이하의 지진을 포함해 연간 200만회 이상 지진이 일어나고, 규모 8이 넘는 지진도 한 해에 한번 꼴로 발생한다고 합니다. 20세기 이후 가장 큰 지진이 일어났던 곳도 칠레입니다. 1960년 발디비아 지역에서 규모 9.5의 강진이 일어나 1700여명 사망했지요. 당시 이재민이 200만명에 이르자 당국은 쓰나미 등 지진 이후의 구호대책 중심으로 방재전략을 다시 짰습니다.

85년 발파라이소에서 규모 7.8의 강진이 다시 일어나자 정부는 건축규정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칠레 건물들은 지진이 일어날 경우 버티다가 무너지기보다는 진동에 따라 휘어지도록 설계돼 있다고 합니다. BBC방송은 “여진 11차례에 6.0 이상의 여진만 5차례가 넘었는데도 집들이 팬케이크처럼 무너져내리지 않은 것은 칠레 방재건축의 승리”라고 보도했습니다. 미국의 비영리기구 지오해저드의 브라이언 터커는 “건축법규가 엄격할 뿐 아니라 인구 대비 지진 전문가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곳이 칠레”라고 말했습니다.

“빈민 참사 막았다”

특히 제 눈에 띈 것은, 아이티 지진이나 2008년 중국 쓰촨성 지진 때처럼 빈민들이 흙집에서 참사를 당하는 일이 이번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인구밀도가 아이티·중국보다 훨씬 낮기도 하지만, 칠레 정부와 방재 전문가들이 저소득층 피해를 막기 위해 공들여온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방재 전문가 캐머런 싱클레어는 “이번 지진으로 건물들이 많이 부서지긴 했지만 아이티에서와는 달랐다”면서 “전문 건축가들이 저소득층 주택의 내진설계를 맡아 보수작업을 해왔다”고 전했습니다. 내진설계 법령조차 없는 아이티와의 차이점이겠지요. 아이티 건축가 파트릭 미디는 “아이티에서는 내진설계가 된 건물이 단 3채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칠레의 경우 60년 발디비아 지진 뒤인 65년 비상방재기구를 만들었고, 74년에는 독립된 국립재난관리정보기구(Onemi)라는 것을 설치해 대비를 해왔습니다. 오네미는 전국-지역(주)-지방 단위로 연락망을 구성해 재난 정보를 전달하고 긴급구조를 하는 일종의 비상 네트워크입니다. 이번에 오네미가 톡톡히 제 몫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발빠른 정부, 차분한 대응

새벽 3시34분에 지진이 일어났지만 정부는 기민하게 움직였습니다. 오는 11일 퇴임하는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몇 분 간격으로 지진 피해와 대피 요령, 현지 상황을 직접 알렸습니다. 아이티의 르네 프레발 대통령이 참사 뒤 하루 넘게 사라졌던 것과 대조되지요.

덕분에 칠레 국민들은 최악의 ‘패닉(공황상태)’을 피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수퍼마켓과 주유소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서 있고 부서진 건물도 많지만 산티아고 거리는 공포 속에서도 의외로 차분하다”고 전했습니다. 일부 절도, 약탈, 교도소 탈출 등의 사례가 없지 않았습니다만 이 정도면 아주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티의 경우 치안 수준이 최악이다보니...

아이티에서 지진 구호작업을 하고 있는 칠레 군 장교 우로 로드리게스는 “지진 소식에 몹시 놀랐지만 가족들의 안부를 확인했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 구호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사주간 타임은 “3월말 열리는 아이티 구호 국제회의에서도 ‘칠레식 대응’이 화두가 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인도양 쓰나미 때와 비슷한 '메가스러스트'


칠레 지진은 23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2004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대지진과 같은 유형의 지진으로, 지질학자들은 이런 초강력 지각활동을 ‘메가스러스트(megathrust)’라 부릅니다.

대형 쓰나미를 동반하는 메가스러스트는 지각판이 다른 지각판 밑으로 파고들어갈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유형의 지진은 지구 지각판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한 환태평양지진대, 이른바 ‘불의 고리(Ring of Fire)’ 지역에서 주로 일어납니다.

칠레가 위치한 남미 서부 태평양 연안은 나스카판과 남미판이 움직이는 곳입니다. 두 지각판은 최근 몇년 동안 연간 8㎜ 정도씩 서로 부딪치며 갉아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번 지진은 태평양 바다쪽의 나스카판이 대륙 지각판인 남미판 아래로 파고들어가면서 일어났습니다. 길이 400km 단층선을 사이에 두고 두 지각판이 50기가톤 규모의 에너지로 부딪쳐 지구 전체에 충격을 미쳤습니다. 미 지질조사국(USGS) 전문가들은 “이번 지진은 거대 지진 중에서도 엘리트급”이라면서 “진앙의 충격 강도로는 1906년 에콰도르 지진 이래 100여년만의 대지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1883년 인도네시아 크라카토아 섬에서 초대형 화산폭발이 일어나면서 쓰나미와 분진이 지구 반대편 미국 플로리다까지 밀려갔다고 합니다. 아시아 쓰나미 사태 때에는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해일이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피해를 입혔지요.

20세기 이후 가장 강력한 지진으로 기록된 1960년 칠레 발디비아 지진 때에도 쓰나미가 일어나 하와이와 일본, 필리핀에까지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번 지진은 진앙에서 가까운 해상에 인구가 많은 섬이나 대륙이 없어 아시아 쓰나미 때보다 해일의 도달 범위는 넓었지만 피해가 적었습니다. USGS에 따르면 지진 규모를 측정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규모가 컸던 스무 차례의 지진 중 18건은 환태평양지진대에서 일어났으며 칠레에서 일어난 것만 네 차례였습니다.


최대 피해지역인 콘셉시온은 비오비오 주(州)의 주도로, 1751년 엄청난 지진 피해를 입은 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도시를 이전했습니다. 250여년 전의 이주가 이번 피해를 줄이는 데에 보탬이 되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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