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어제의 오늘/ 1947년 '미국의 소리' 옛소련권 전파 송신 시작

딸기21 2010. 2. 1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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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절 반공 이데올로기와 ‘미국식 체제’의 우월성을 전파하던 도구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다. VoA의 출범은 2차 대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0년대 이미 미국에는 NBC 국제라디오방송, 화이트넷 등 다국어 민간 단파라디오방송들이 있었다. CBS 남미 네트워크는 대륙 곳곳에 64개 방송기지를 두고 단파라디오 방송을 했다. 39년 연방통신위원회(FCC)는 ‘미국의 방송사들이 해외로 전파를 보낼 경우 미국 문화를 보여주고 국제 우호와 상호이해를 증진시키는 데에 힘써야 한다’는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여기 맞지 않는 민간방송들의 서비스를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양차 대전 와중에 세계를 네 편 내 편으로 가르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기였기에, “언론검열”이라는 방송사들의 항변은 묻혀버렸다.

40년 남미를 나치 선전에서 지켜낸다는 명분에 따라 국무부 산하 ‘미주조정국’에서 남미권을 대상으로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42년 1월 미 정부는 군가 격인 ‘양키 두들(Yankee Doodle)’을 막간에 집어넣으며 뉴스를 전하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공식 출범시켰다. VoA는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이탈리아에 점령된 북아프리카, 나치 독일 영토 등 곳곳으로 방송을 확대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VoA는 이미 40개 언어로 세계 39곳의 송신기지를 이용해 방송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가 전하는 소식은 좋은 소식일 수도 있고 나쁜 소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진실입니다.”
전체주의 ‘추축국’의 피억압민들에게 VoA는 자유로운 미국에 대한 상상을 부추기는 목소리였다.

VoA가 냉전의 첨병으로 굳어진 것은 1947년 2월 17일 소련에 러시아어 방송을 보내면서부터다. 미국 지도자들의 음성과 미국 자본주의의 발달상이 공산진영에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소련은 VoA 방해전파까지 내보냈지만 역부족이었다.
50년부터 VoA는 아랍어방송도 시작했다. 56년 수에즈 운하 위기, 58년 ‘6일 전쟁’ 등에서 아랍권 민중들에게 친이스라엘 선전을 하려 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50년대와 60년대 VoA는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등 음악방송에도 힘을 기울여 미국 대중문화를 알리는데 앞장섰다. 미국 내에서 민권운동이 거세지자 VoA에도 바람이 불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 방송을 타기도 했다.

89년 중국의 개방정책에 발맞춰 VoA도 만다린·광둥어 서비스를 시작했다. 냉전이 끝난 뒤에는 방송의 방향전환이 두드러졌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VoA를 감독하던 국무부 미국정보국(USIA)을 없애고 이 방송을 방송위원회(BBG) 관할로 넘겼다. 방송위는 VoA를 비롯한 관영언론들이 정치적 입김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이지만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들로 운영되며, 국무부 장관도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한다.
현재 VoA는 미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 캘리포니아주 딕슨과 들라노, 하와이, 일본 오키나와,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중미의 코스타리카와 벨리즈에 송신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2001년 9·11 테러 뒤 VoA는 오사마 빈라덴을 숨겨주고 있다는 의심을 받아온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지도자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의 인터뷰를 내보내 논란을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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