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재난은 세계인들의 인도주의가 빛을 발하는 무대가 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도 국제정치의 메커니즘은 작동한다. 재난이 각국간 신경전과 줄다리기의 장이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반면 참사를 계기로 화해가 무르익는 경우도 있다.
점령이냐 원조냐
지난 12일 아이티가 대지진으로 초토화됐을 때, 아이티 인프라 복구와 치안유지·재건 지원에 가장 먼저 팔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미국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항공모함까지 동원해 병력을 파견한 것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다.
남미 반미국가들이 가장 먼저 미국 비판에 나섰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미국이 지진을 이용해 아이티를 점령하려 한다”고 했고,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도 “미국의 파병은 군사적 점령을 시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공격했다.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도 미군 철수를 촉구했다.
미국이 포르토프랭스 루베르튀르 국제공항의 관제탑을 비롯한 주요 시설을 통제하기 시작하자 프랑스도 볼멘소리를 냈다. 알랭 주아양데 프랑스 협력담당 국무장관은 민항기를 타고 로베르튀르 공항에 갔다가 미군에 입국을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주아양데 장관은 “미국의 역할은 아이티를 돕는 것이지, 아이티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맹비난했다.
그러자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매우 분노스럽다”면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지난달 26일 국무부 직원들과 함께한 공개석상에서 “유례없는 대재난에 맞서기 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리더십과 미국인들의 노력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화가 난다”고 말했다. 클린턴 장관은 아이티 지원을 비난하는 움직임에 적극 대응하도록 각국 공관들에 지시하기도 했다.
부실한 아이티 정부를 대신해 사실상 국가를 운영하다시피 해온 유엔마저 지진에 강타당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아이티의 치안을 유지할만한 물리력을 가진 것은 미국 뿐인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논란의 와중에 ‘아이티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미군 통제로 논란이 된 로베르튀르 공항은 남미 해방투쟁의 전사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던 프랑수아-도미니크 투생 로베르튀르를 기려 명명된 곳이다.
아이티는 흑인 노예출신 혁명가들의 투쟁으로 1804년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했다. 서반구에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독립한 것이 아이티였다. 하지만 미국과 아이티의 독립 과정은 천지차이였다. 영국과 싸워 미국을 세운 사람들은 백인 엘리트층이었고, 프랑스와 싸워 아이티를 세운 사람들은 흑인 해방노예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 백인 정권은 아이티의 독립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아이티 건국의 아버지인 루베르튀르는 ‘검은 스파르타쿠스’라 불렸던 사람이다. 노엄 촘스키는 <507, 정복은 계속된다>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날까지도 아이티 학생이라면 누구나 루베르튀르가 프랑스로 끌려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을 암송한다. ‘내가 무너진다면 생도밍고의 단 하나뿐인 자유의 나무는 쓰러지고 말리라. 그래도 자유의 나무는 다시 살아나 땅 속 깊이 수많은 새로운 뿌리들을 내리리니.’”
여기서 말한 여기서 말한 생도밍고는 현재의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인 산토도밍고를 말한다. 루베르튀르는 그렇게 싸워, 피로써 아이티라는 나라를 세웠다. 지진으로 무너진 그 곳에서, 200여년 뒤인 지금 미국과 프랑스가 다시 점령이네, 아니네 말싸움을 하는 꼴이다.
지진으로 친해지고, 태풍에 정권 잃고
반면 껄끄럽던 나라들이 재난을 계기로 가까워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 11월 이란 케르만주의 유적도시 밤(Bam)에서 일어난 지진이었다.
당시에도 미국과 이란은 앙숙이었지만,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란 구호활동을 돕겠다며 경제 제재를 일시 완화하는 호의를 베풀었다. 이란의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은 “정치문제와 직접 연결시킬 수는 없지만 미국의 지원에 감사한다”고 했고, 미 국무부 관리들은 원조를 위해 이란 관리들과 실무 대화를 벌였다.
그 후의 핵 논란으로 관계가 다시 냉각되긴 했으나 양국 간에는 한때나마 해빙무드가 연출됐다. 정작 하타미 정권은 재난 대응에 미숙한 모습을 보여 궁지에 몰렸다.
2005년 10월 인도-파키스탄 사이의 영토분쟁 지역인 카슈미르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특히 파키스탄 쪽의 피해가 심해서 8만명 가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고 이재민이 수십만명에 이르렀다. 인도령 자무카슈미르와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사이의 경계선인 국경통제선(LoC)에서는 한겨울 매서운 추위 속에 병사들이 노숙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자 인도 군인들이 LoC를 넘어들어가 파키스탄 군대의 벙커 복구를 도왔다. 이전 같았으면 선을 넘는 것만으로도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터인데 재앙이 오랜 적대감정마저 누그러뜨린 것이다.
터키 서북부 이즈미트와 이스탄불을 강타한 1999년 8월 지진 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그리스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오랜 지배를 받았고 현대 터키와도 사이가 나빴다. 두 나라는 지중해 키프로스섬을 놓고 무력충돌 직전까지 갔던 사이였다. 하지만 터키가 재난을 당하자 그리스는 구호품과 구조대원을 아낌없이 보냈다.
한달 뒤, 이번에는 그리스 아테네 부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스와 터키는 지질학적으로 아시아판과 유럽판이 만나는 지역에 있어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 이즈미트 지진으로 1만7000명 이상이 숨진 것에 비해 아테네 지진은 사망자 수가 140여명에 불과했지만 터키는 구조대원을 파견해 그리스의 도움에 보답했다.
이를 계기로 오랜 역사·유적을 가진 아테네 시장과 이스탄불 시장이 서로 만나 광범위한 협력협정을 맺는 등, 화해조치들이 잇따랐다. 두 나라의 ‘지진 외교(earthquake diplomacy)’는 한동안 국제사회의 관심사가 됐다.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 원자바오 총리는 무너진 집더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구조를 기다리는 이들의 희망을 북돋워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의 면모를 과시했다. 낡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 총리, 서민총리로 알려진 원 총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들이 공개돼 감동을 줬다.
하지만 재난이 일어나면 대개는 참사 원인 공방과 뒤처리 문제로 정치지도자들에게 비난이 쏠리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낸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건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태도에 미국민들은 크게 분노했고, 한순간 미국은 세계의 원조를 받는 불우한 나라가 됐다. 미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부실 관료기구의 상징으로 변했다.
지난해 태풍 모라꼿에 늑장대응한 대만 마잉주 총통은 2012년 재선 가도에 빨간 불이 켜졌다. 마 총통은 태풍 뒤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10%포인트나 떨어졌다.
이번 지진 참사 뒤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구설수에 올랐던 르네 프레발 아이티 대통령은 며칠전 기자회견에서 “재집권을 시도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반미 투사로서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전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였던 프레발은 2004년 아리스티드가 축출되고 2년 후인 2006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집권 뒤에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경제개혁, 갱 퇴치작전 등을 벌여 국제적으로는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결국은 지진으로 무능력을 드러내고 손가락질 받는 처지가 됐다.
'딸기가 보는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엔 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 사의 (0) | 2010.02.18 |
---|---|
사라져가는 언어들 (0) | 2010.02.05 |
2009 스러진 별들 (0) | 2009.12.27 |
경향신문이 뽑은 <2009 세계 10대 뉴스> (0) | 2009.12.27 |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에 살릴 셰티 (0) | 2009.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