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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널린 주검들과 먹을 것을 찾기 위한 약탈극. 지진에 강타당한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도심은 아비규환으로 변했지만 구호행정의 손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부는 사실상 ‘실종상태’이고, 주민들은 구조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가족들을 찾아 건물더미들을 파내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직전에 이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AFP통신은 지진 사흘째인 14일(현지시간) 포르토프랭스 곳곳에서 주민들이 중장비가 없어 맨손과 곡괭이로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시신을 가릴 천이 모자라 거리엔 그대로 버려진 주검들 천지랍니다. 무너진 병원 앞마당과 거리 곳곳에서 시신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시신안치소 앞에는 가족의 주검이라도 찾으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집니다.
도심에선 총격 소리가 들려오고, 주민들은 물이 모자라 싸우기 시작했다고 구호요원들은 전합니다. 시내 식품가게들도 모두 털렸습니다.
포르토프랭스 시내에 있던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구호식량 창고도 약탈당했습니다. WFP는 창고 안에 있던 1만5000톤의 구호식량 중 얼마나 남아있는지 조사하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약탈이 벌어지고 있지만 아이티 경찰은 시신을 거둬들이는 작업만 하고 있을 뿐 치안유지는 엄두도 못 냅니다. 시사주간 타임은 “이대로라면 다시 갱들이 아이티를 장악할지 모른다”며 “몇년에 걸친 유엔의 갱 퇴치 작전이 무위로 돌아갈 판”이라고 전했습니다.
분노한 주민들과 갱들의 약탈로 구호요원의 안전마저 위협받는 상황입니다.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도미니카공화국 구조대의 델핀 안토니오 로드리게스 대장은 “최대 난제는 치안 문제”라며 “밤이 되면 주민들의 공격과 약탈이 두려워 구조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국민들의 분노는 정부로 향하고 있습니다. 시사주간 ‘타임’의 사진기자 숄 슈워츠는 “최소한 2곳에서 시신으로 거리에 담을 쌓은 것을 보았다”면서 “성난 주민들이 시신으로 길을 막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르네 프레발 대통령은 재난 현장에서 진두지휘하기는커녕 안전한 공항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대통령궁이 무너진 뒤 임시거처로 삼은 투생 루베르튀르 국제공항에서 외신 기자회견을 하고, 레오넬 페르난데스 도미니카공화국 대통령을 만났지요. 유엔 구호관리자 데이비드 윔허스트는 “국민들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며 정부에 대한 분노로 폭발하기 직전이라고 전했습니다.
구조활동 왜 잘 안 되나
아이티를 돕기 위해 세계가 나서고 있지만 구조·구호활동은 아직 본격화되지 못하고 있죠. 분쟁과 재난 구호에 능숙한 국제기구 요원들도 최소한의 인프라조차 부족한 아이티 지진 앞에서는 발만 구르고 있습니다. 지진 이후의 수습이 안돼 ‘2차 재앙’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커지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중장비가 없어 흙더미와 콘크리트 잔해를 맨손이나 곡괭이로 파내고 있습니다만 여진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데다 금이 간 건물들이 계속 붕괴하고 있어, 추가 사상자가 우려되는 형편입니다. 열감지장치 등 첨단장비는 꿈도 꾸지 못하죠. 구조 전문가들이 와야하는데, 아직 각국 파견인력이 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도착한 구조요원들도 도로가 끊겨 현장에 접근을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통신이 두절돼 어디에 매몰자가 얼마나 있는지 가늠하기 힘든 것도 문제라고 합니다. 장-밥티스테 라퐁텐이라는 시민은 AFP에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산 사람을 찾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구조 전문가들은 매몰자들을 살리는 데에 가장 중요한 72시간이 지나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중장비와 구호품, 인력을 실은 비행기들이 14일 오후부터 포르토프랭스의 투생 루베르튀르 국제공항에 내리기 시작했지만 공항 여건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미 연방항공국(FAA)은 이날 이 공항으로 가는 미국발 민항기 운항을 일시 중단시켰습니다. 공항에 착륙할 장소가 모자라는데다, 비행기들이 돌아올 때 넣어야 할 연료 비축분이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군요.
유럽·아시아 등지에서 온 수송기들이 도미니카공화국에 내려 육로로 물품을 전하는 방안도 있지만 도로사정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전날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했다는 세계식량계획(WFP) 구호요원 알레한드로 로페즈-치체리는 “모든 여건이 좋지 않으며, 수송이 너무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미 연방재난관리청(FEMA) 관리 출신인 마크 메릿은 “헬기를 활용한 ‘노르망디식 수송작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가중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구호행정이 붕괴됐기 때문입니다.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자연재해센터의 캐슬린 티어니는 AP인터뷰에서 “자연재해와 그 이후의 혼란은 다른 문제”라며 재해가 2차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구호단위 간 조율(coordination)이라고 말했습니다. 과거 아이티 허리케인 사태와 터키 지진 등에서 구호활동을 했던 하버드대 ‘인도주의 이니셔티브’의 마이클 반 루옌 팀장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지 않고 할 일을 찾게끔 조직하는 게 최대 현안”이라고 말했습니다.
대개는 현지 정부가 인력을 조직하고 유엔이 조율을 맡습니다. 2004년 아시아 쓰나미 사태 때에도 구호활동이 체계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강력한 정부가 있었던 인도네시아와 달리 아이티는 행정체계가 무너진 상태인 것이 문제지요. 조율과 통합 관리를 맡아야 할 유엔마저 지진피해를 입었습니다. 14일 유엔 조사·조율팀이 도착해 업무를 시작했지만 일이 진척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1994년 르완다 내전 때 국제구호기구들은 ‘스피어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재난구호 매뉴얼을 만들었습니다. 344쪽 분량의 이 매뉴얼에는 이재민·난민들에게 공급해야 하는 식료품의 성분과 양에서부터 임시대피소 건설과 위생처리 등등 구호활동의 제반 과정에 대한 지침이 나와있습니다.
지침에 따르면 구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속·투명한 피해조사, 그리고 구호·재건에 주민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기구간 의사소통을 원활히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신이 나뒹구는 거리에서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어도 지금은 도로사정이 좋지 못해 구호를 못하고 있습니다.
시신 처리도 시급합니다. 세간의 생각과 달리, 시신 때문에 전염병이 쉽게 일어나거나 악화되는 일은 별로 없다는 군요. 하지만 널려진 시신들은 생존자들을 더욱더 절망에 빠뜨리고 심각한 트라우마(후유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겁니다. 무너진 건물 잔해 등 폐기물을 치우는 것도 함께 진행돼야 합니다. 집을 다시 짓기 전까지는 이재민의 삶이 정상화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메릿은 “필요한 것은 너무 많은데 900만명이 작은 섬에 고립돼 있다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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