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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착륙 40주년

딸기21 2009. 7. 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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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달에 첫발을 디딘 지 오는 20일로 40년이 된다. 미국 항공우주구(NASA) 달탐사선 아폴로11호가 우주인들을 싣고 달에 착륙한지 벌써 40년이 된 것이다. 미-소 냉전의 군비경쟁이 만들어낸 이벤트였다고는 해도, 인류의 달 착륙은 세계의 지평을 넓힌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여기는 고요한 바다”

아폴로11호가 발사된 것은 미국 시간으로 1969년 7월 16일이었고, 달에 도착한 것은 20일이었다. 아폴로 프로젝트의 5번째 유인비행, 달을 향한 3번째 유인항해 시도 끝에 이뤄진 성공이었다. “60년대 말까지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던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약속(61년5월)이 9년만에 현실로 이뤄진 것이기도 했다.

우주선은 사령부(커맨드모듈)인 ‘컬럼비아’와 관측부(루나모듈) ‘이글’로 구성됐다. 컬럼비아는 쥘 베른의 공상과학소설 ‘달로의 여행’에 나오는 포탄에서, 이글은 미국의 상징인 대머리독수리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승무원 3명 중 기장인 닐 암스트롱이 가장 먼저, 이글호 파일럿 에드윈 알드린이 두번째로 달에 발을 디뎠다. 착륙지점은 달의 ‘고요한 바다’였다. 우주선에 남아있던 마이클 컬린스까지, 세 명의 승무원은 모두 NASA가 자랑하는 최고의 베테랑들이었다.

암스트롱은 착륙 뒤 텍사스주 휴스턴의 JFK우주센터에 “휴스턴, 여기는 고요한 바다. 이글은 착륙했다”는 말을 보내왔다. 달 여행자가 지구에 보내온 첫마디였다. 하지만 역사에 길이 남은 이 교신이 당시에 우주센터에서 숨죽이고 기다리던 엔지니어들에게는 큰 혼란을 주었다고 한다. 원래 약속된 교신 암호는 “여기는 이글”이었는데 암스트롱이 발신지를 ‘고요한 바다’로 바꾸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는 것. 
암스트롱은 착륙 뒤 6시간 반만에 우주선에서 나와 달 표면을 밟은 뒤 “한 사람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는 위대한 도약”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달의 암석과 토양을 채취하며 34분간을 보낸 두 승무원은 우주선으로 돌아와 7시간 동안 휴식한 뒤 지구로 돌아왔다.

달을 향한 꿈의 기록

근대과학이 발달하면서 달은 신앙의 대상에서 탐구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로켓엔진이 발명되자 인간은 달 여행의 동력을 손에 넣은 셈이 됐다.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노력이 본격화된 것은 냉전이 시작되면서였다. 그 첫걸음은 59년 9월 소련이 쏘아올린 루나2호였다. 이 우주선은 인류가 달에 닿게 한 첫 탐사선이었지만, 경착륙으로 파괴되는 바람에 탐사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 다음 달 발사된 루나3호는 달궤도를 돌며 지구에서 보이지 않는 가려진 ‘달의 저편’을 촬영해 보내왔다.
66년 2월 루나9호가 최초로 달 표면 착륙에 성공해 역시 사진을 전송했다. 이 때까지는 소련이 달 탐사를 주도했다. 전세가 바뀐 것은 미국의 아폴로계획이 힘을 받으면서였다. 68년 12월 아폴로8호 유인우주선이 처음으로 달 궤도에 진입했고 이듬해 아폴로11호의 쾌거로 이어졌다. 70년 소련은 루노호드1호 로버(이동식 탐사로봇)를 달에 보내는 데 성공했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미국과 소련은 유·무인탐사선을 달에 65차례 착륙시켰다. 71년에는 한 해 동안에만 10차례 탐사선이 달에 닿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72년 미국 아폴로17호에 탔던 우주인 유진 서난을 마지막으로 인류는 더이상 달에 직접 발을 대지는 않았다. 소련은 76년 루나24호를 끝으로 달 탐사를 중단했다. 미국은 98년부터는 달 탐사용 인공위성 발사도 중단했다. 달 탐사 붐이 시들해진 것은, 두 강대국의 관심이 태양계의 다른 행성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미국은 화성에, 소련은 주로 금성에 몰입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유인탐사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것이 문제였다. 과시성 경쟁의 효과가 줄어들자 계속 유인 달 탐사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두 라이벌의 경쟁은 무인탐사선을 누가 더 태양계 끝으로 ‘멀리’ 보내는가 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 대신 유인 우주개발은 우주정거장에 초점이 맞춰졌다. 소련의 ‘미르’에 이어 탄생한 국제우주정거장(ISS)은 냉전이 끝난 뒤 다국적 협력체제로 운영돼, 시대의 변화를 보여줬다.

다시 불붙은 달 탐사 경쟁

근 30년간 잠잠했던 달 탐사 경쟁은 2000년대 들어와 일본, 중국, 인도, 유럽이 우주과학기술에 눈을 돌리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NASA와 러시아연방우주국(로스코스모스), 유럽우주국(ESA),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 중국 국가항천국(國家航天局ㆍCNSA), 인도 우주연구기구(ISRO), 브라질 우주국(AEB) 등이 경쟁적으로 우주탐사 계획을 내놓고 있다. 
2004년 1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달 유인탐사를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2014년까지 새 유인 달 탐사선을 제작한 뒤 2018~20년 4차례에 걸쳐 발사할 계획이다. ‘컨스텔레이션 프로그램’이라는 유인탐사 계획의 일환으로 만들어질 새 달 탐사선의 이름은 ‘알테어(Altair)’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알테어는 아폴로의 3배 크기에, 탑승인원도 4명으로 늘어난다. 미국은 2020년까지는 달에 유인기지를 세운다는 목표다.
상설 연구기지가 만들어지면 유인우주선이 연간 6차례 왕복을 하게 된다. 미국은 지난달 달 궤도위성 ‘루나 레커네슨스 오비터’를 쏘아올려 달 탐사 재개를 알렸다. 오비터는 5일 첫 위성사진을 보내왔다. 10월에는 충돌관측위성(LCROSS)을 보내 달 표면에 부딪치게 할 계획이다. 달에 우주기지가 완공되면 2037년까지는 달에서 화성으로 유인 착륙선을 보내겠다는 계획인데, 거기 들어갈 세금을 미국인들이 순순히 내려 할지는 알 수 없다.



NASA가 2007년 공개했던 달 유인 우주기지 상상도


미국에 이어 가장 앞선 우주탐사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물론 러시아다. 러시아는 루나-글로브(Luna-Glob)라는 이름의 달 탐사 계획을 재개할 예정이며 2012년 우선 무인 착륙선과 궤도위성을 발사할 계획이다. 2025년 화성 유인탐사에 들어가겠다고 밝히긴 했지만 재정문제 때문에 적극 나서지는 못하고 있다.

다음번 달 착륙은 아시아인?

러시아 외에 기술과 돈을 가진 쪽은 유럽이다. ESA는 영국 국립우주센터(BNSC)와 공동으로 2003년 화성탐사선 비글2호를 보냈다. 착륙 즉시 고장나 교신이 멈추긴 했지만 어쨌든 착륙까지 시킬 기술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탈리아 우주국(ASI)도 토성의 위성 타이탄으로 탐사선 호이겐스를 NASA와 공동제작해 실력을 과시했다. ESA는 2025년까지 화성에 유인 착륙선을 보내고 2033년까지는 태양계의 주요 위성들에 유인 우주선을 보내는 ‘오로라 계획’을 추진 중이다. 우선 2011년 화성에 새 로버 브리짓을 보낼 예정이다.

일본 JAXA는 2005년 소행성 이토가와를 탐사한 하야부사 탐사선을 발진시켰고 이듬해에는 태양탐사선 ‘히노데’, 2007년에는 달 탐사위성 ‘셀레네(일본명 ‘카구야’)를 잇달아 쏘아올렸다. 지난해에는 ISS의 실험모듈 키보(KIBO·‘희망’)를 발사했으며 오는 2013년에는 유럽과 협력해 수성에 무인탐사선을 보내려 하고 있다. 미국 우주과학전문 웹진 사이언스닷컴은 지난달말 카구야가 달에서 감마선 분광계를 이용해 우라늄 성분을 탐지했다고 보도했다. JAXA는 “이 밖에 다른 방사능 원소들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핵발전 연료인 우라늄이 지구에서 벌써 바닥을 드러낼 조짐을 보이자, 꿈 많은 과학자들은 “달의 우라늄을 가져오자”는 아이디어들을 내놓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달 탐사 경쟁이 우라늄 자원경쟁으로 비화될 판이다.
중국은 2년전 최초의 달 탐사위성 ‘창어(嫦娥) 1호’를 발사했다. 이미 유인우주선 기술을 갖고 있는 중국은 2017년 달 유인탐사선을 내보낼 계획이다. 인도도 2020년 자국인을 달에 착륙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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