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시라크 대통령 집권 전 14년 동안 프랑수아 미테랑의 좌파 정권이 프랑스를 지배했다. 19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영국과 미국에서 국가경쟁력을 최우선시하는 신자유주의 정권이 힘을 떨칠 적에 프랑스는 반대의 길을 갔던 셈이다.
좌파 정권을 끝내고 집권한 시라크 대통령은 그러나 국민들이 기대했던 개혁조치를 펼치는데 실패했다. 실업률과 경제 침체에 시라크는 좌파식 해법을 도입, 대응하려 했지만 효과를 얻지 못했다. 1999년 좌우 타협의 산물로 탄생한 주35시간 노동제는 노동시간을 줄여 고용인원 수를 늘리자는 `일자리 나누기(job곀sharing)' 전략이었으나 실업률은 줄어들지 않았다. `관대함'으로 표현되는 프랑스의 `내멋대로 문화', 불친절하고 비효율적인 공공서비스와 잦은 파업이 글로벌 경쟁시대의 장애물로 인식되면서 중산층이 좌파식 해법에 등을 돌렸다. 엘리트 산실 파리행정학교(ENA)를 나온 세골렌 루아얄 사회당 후보가 대중적인 정서를 공략한 `이단아'에게 패배했다는 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는 저성장, 고실업, 재정적자의 3중고를 겪고 있었다. 1981년 세계 7위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22위로 떨어졌다. 작년 경제성장률은 2.1%였는데 그나마 최근 몇년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다. 실업률은 8.3%인데 청년실업률은 20%대여서 젊은층의 좌절감이 심각하다. 정부 지출이 전체GDP의 54%를 차지할 정도로 공공부문이 비대해져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정부가 움직이지 않으면 고용도, 경제활동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떤 이들은 `좌우 구분은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며 프랑스의 사회복지체제가 급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와 다른 프랑스식 시스템에 자부심을 가진 국민들이 아직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등 외신들이나 UMP 내 사르코지 측근들의 분석은 다르다. 사르코지는 `혁명에 가까운 개혁'을 주장해왔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부칠 가능성이 높다. 공공부문 고용 감축, 재정 축소, 150억 유로(약 18조8000억원) 규모의 감세조치 등을 통해 프랑스 근로자들의 체질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것. 사르코지의 개혁조치는 중도우파가 집권한 북유럽 다른 나라들의 개혁보다 훨씬 강도가 높고 속도도 빠를 것으로 예상된다.
정책이 없었다. 루아얄은 청년실업을 줄이기 위해 구직 자금을 지원하고 공공부문 고용을 더 늘리며 주35시간 노동제를 더 많은 분야로 확대한다는 실업대책을 내놨다. 공공부문 근로자들은 루아얄을 많이 찍었지만 중산층들은 이런 해법이 효과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외교정책에서는 경륜 부족과 미숙함만을 드러냈다. 루아얄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2002년 대선 때 결선에 진출하지도 못했던 사회당은 이번엔 루아얄 개인의 인기에만 기대려고 했다. 좌파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국가전략과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데 실패했다.
1차 투표에서 루아얄을 제외한 나머지 좌파 후보 5명이 얻은 표를 모두 합쳐도 10% 밖에 안 된다. 대선 뒤 수습과정에서도 당내 강경파들이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 "좀더 사회주의 노선에 충실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분열상을 드러냈다. 결선에서 루아얄에 투표한 46.5%의 유권자들 중엔 사회당 노선에 찬성해서라기보다는 사르코지라는 인물에 거부감을 느껴 좌파를 선택한 이들도 많다. 대선 전 여론조사에서 루아얄의 지지율은 30%를 넘긴 적이 거의 없었다.
비판론자들은 사르코지의 `독재성향'을 지적한다. 현지언론들은 한치의 소란도 없이 `질서'와 `규율'에 맞춰 진행되는 UMP의 사르코지 지지자 집회를 파시스트 집회에 비교하기도 했다. 이민자 홍수 속에 치안, 질서를 중시하게 된 유권자들은 사르코지를 `새로운 프랑스'의 상징으로 여기고 숭배하는 반면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은 인종차별적 발언도 서슴지않는 사르코지를 파시스트로 간주한다. 사르코지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유권자들 중에서 중간적인 입장은 사라지고 `호감도의 양극화'가 일어난 셈이다. 반대파는 사르코지가 사회통제를 강화하고 치안강화를 내세워 반대파를 은밀히 탄압할 것이라며 공포심과 혐오감을 표현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계속되는 유럽 `우파 집권 도미노' 현상의 주요 요인으로는 실업률 등 경제문제와 이민자 반대 정서를 들 수 있다. 이민자 문제에서 사르코지의 입장은 `선별적 수용'으로 요약된다. 고학력, 전문직 이민자를 주로 받고 제3세계 저소득층 출신 이민자는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 EU 전체의 승인이 없이 몇몇 회원국들끼리라도 이민 제한을 위해 공동전선을 펼칠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이슬람국가인 터키가 유럽연합(EU)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 이민자, 특히 무슬림 이민자들을 가장 많이 수용해온 프랑스가 빗장을 닫아걸면 유럽 전체의 이민 억제 기류가 크게 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시라크 대통령 시절보다는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확실히 가까워질 것이다. 사르코지는 시라크 대통령이 미국과 감정싸움을 벌여 프랑스가 이득을 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입장이다. 실제 프랑스는 이라크전 반대 선봉에 섰다가 전후재건 사업에 숟가락을 얹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감각이 뛰어난 사르코지는 자국 내 반발 여론을 무시하면서까지 미국을 따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프랑스 기업들의 이익을 우선시해, 구체적인 이슈에선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낼 가능성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환경문제다. 사르코지는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유럽 내 환경정책 주도권, 즉 `그린 이니셔티브'를 영국과 독일에 내어준채 바라보고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르코지는 교착상태에 빠진 EU 통합의 속도를 빨리 하되 통합의 강도는 낮추자는 입장이다. EU의 위상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자는 것. 그 대신 들고나온 것이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남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잇는 `지중해권 국가연합체' 구상이다. 프랑스를 포함해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키프로스, 몰타, 터키, 레바논, 이스라엘,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를 묶어 경제협력, 노동이민 공동대처, 공동 안보와 대테러 정책 등을 펼치자는 것. 스페인과 이스라엘 등은 찬성하지만 터키는 자신들을 EU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라며 반발하고 있다. 과거에도 스페인 주도하에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고 이번에도 성사 여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현재 서유럽에서 좌파 정당이 집권한 나라는 스페인, 이탈리아, 노르웨이 정도다. 영국은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블레어 총리 이래 우파나 다름없는 행보를 보여왔다. 이민자 물결과 불안정 고용은 세계화의 부산물이며 유럽이 아무리 애써도 완전히 차단할수 없을 것이다. 당분간 이 문제를 둘러싼 사회갈등과 대안 논쟁이 이어질 전망이다. 계급 갈등을 앞세운 고전적인 좌돚우 구분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이슈별로 유연한 접근을 보여주는 세력이 정치적 성공을 거둘 것이다. 현재로선 우파가 그런 적응에 더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이보 다알더 연구원은 프랑스 대선결과에 대해 "유럽인들이 경제적, 사회적 `현대화'를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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